
개울가의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얼음을 녹일 정도의 포근한 날씨에 얼음이 더 붙어 있을 힘이 없는 모양이다. 겨우내 메말라 있던 잡풀들이 황토색 허물을 벗고 초록빛을 조금씩 밀어내고 있다. 숨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땅속에 숨어 있던 풀잎들의 뿌리가 봄기운의 느낌을 받고 서서히 깨어난다.
아침 출근길에 내뿜어지는 입김에서 진한 연기 같은 색깔이 많이 여려졌다. 밤을 지난 한 겨울, 차가웠던 날들을 지나 봄이 기지개를 펴고 있다. 다시는 봄이 오지 못하게 할 듯이 맹위를 떨치던 겨울도 한걸음 물러서 있다.
하지만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음인지 아지랑이의 모습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한낮의 따스한 볕을 벗 삼아 하천을 따라 거니는 노인들의 모습이 한가롭기만 하다. 뒷짐을 지고 강아지와 함께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이 여유롭기만 하다. 길섶의 서리와 대화를 나누며 걷는 것 같다.
깊이 자리하고 있는 뿌리의 세상을 들여다보면 나무줄기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잎들이 모양을 갖추기에는 아직 멀리에만 있는 봄이라 할지라도 희망적인 엷은 초록의 기지개를 준비하고 있다.
점심시간에 회사의 뒷동산에 올라가 본다. 겨울바람을 이겨내고 혹독한 추위를 몸으로 막았을 풀잎들이 싹을 틔우고 있다. 내려오는 길의 시골집의 소 우리에는 암소 한 마리가 여물을 부지런하게 되새김질 하고 있다. 봄볕이 들어오는 방향에 맞춰 송아지 한 마리가 볕 쪼임을 하고 있는데 등 위에는 추위를 이기기 위한 멍석을 덮고 있다. 여물을 먹고 있는 소가 어미인데 송아지는 태어난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고 주인이 말한다.
그 춥던 겨울을 지나 오랜만에 따스한 햇빛을 맞이한 소들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어미는 풍부한 영양을 섭취하고 새끼는 포근하게 자외선으로 일광욕을 즐긴다. 그 옆에서 장난기 서린 강아지가 송아지에게 다가가 같이 놀자고 해도 송아지는 귀찮은 모양을 하고 외면해 버린다. 고양이에게 가 보니 바짝 몸을 웅크리고 방어 자세를 풀지 않는다.
잎이 돋아야 할 나뭇가지들은 아직 봄의 향기를 외면하고 있다. 깡마른 모양새 그대로다. 봄바람이 부드럽지 않게 불어오기라도 하면 부러져 버릴 것 같다. 그 위에 까치 두 마리가 앉아 있다. 따스한 봄볕과 함께 기지개를 켤 날이 머지않았다.
어제 비가 내린 이후 아침저녁의 기온을 보니 온도가 조금 올라가 있다. 그 비가 봄을 재촉하는 봄비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봄비라 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나의 사무실 창가에 있는 화초들을 손질한다. 언제나 겨울을 실내에서 보내기는 해도 추위를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다. 겨울 햇빛을 적게 본 관음죽의 이파리 가운데 몇 조각은 누런빛을 띠고 있다. 가위로 잘라 준다. 이름이 뭔지 모르는 화초가 하나 있다. 겨우내 마치 들꽃 같은 하얀 꽃이 피고 졌다.
이 화분 저 화분에 번져 새끼를 쳐 놓았다.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줄기는 어느새 물이 마르고 쭈그려 들었다. 하나 둘 마른 줄기를 뽑아내니 이발을 한 것처럼 말끔하다. 분홍빛 잎사귀가 더욱 화사하다.
군자란은 꽃봉오리가 보일 듯 말 듯 맺혀있다. 화분에는 심은 적도 없는 잡초들이 제법 무성하게 함께 자리하고 있다. 하나둘 잡초를 뽑고 나니 흙 속에서 봄내음이 피어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실내의 흙 속에도 봄은 있다. 그 봄이 흙속에서 함께 숨을 쉬고 있다. 봄이 갇힌 방을 벗어나 울타리를 뛰쳐나오고 싶은 모양이다.
아직 겨울이 물러간 것은 아니지만 입춘이 지났고, 우수, 경칩이 머지않았으니 봄이 기지개를 활짝 켤 것 같다. 봄이 찾아올 때쯤에 어려운 경제도 희망의 나래를 활짝 폈으면 좋겠다. 마치 봄 눈 녹듯이.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