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재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의 긍정적인 덕목을 하나 꼽으라면 인종이나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우린 모두 생(生)과 사(死)의 경계인(境界人), 곧 지구별에 잠시 머무는 우주나그네 ‘코스미안’임을 각성케 해주는 것이리라.
몇 년 전 서울 신문로 2가 성곡미술관에서 재중동포 2세 작가 최헌기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었다.
“부모의 나라 한국과도, 살아온 나라 중국과도 구별돼 살았다”는 경계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작품으로 시작해 태극기, 인공기, 오성홍기를 엉망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 관객들이 서명을 하도록 한 그의 1994년 작 ‘자화상’이었다.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동상이 각각 깃털펜, 만년필, 붓을 들었다. 이들이 공중에 흘려 쓴 의미를 알 수 없는 글귀들이 마구 뒤엉켜 붉은 빛의 구(球)를 만들었다. 구의 표면에는 롤렉스-프라다 -르노 등 명품브랜드 상표 이미지가 붙어 있었다. 사상가의 공허한 이상과 거대 자본을 향한 욕망이 뒤섞인 중국의 현실은 흐릿한 불빛처럼 어지럽고, 이들 가운데 반투명 허수아비만이 꼿꼿이 서서 붉은 심장에서 빛을 반짝이는 것이었다.
평면작품 속의 모나리자, 오사마 빈 라덴, 자유의 여신상은 각각 서구적 아름다움과 폭력, 자본주의를 상징한 것이었다. 그는 이 위를 반투명한 막으로 덮은 다음 초서체를 본뜬 의미 불명의 낙서 광초(狂草)로 다시 뒤덮었다. 플라스틱, 실리콘, 철사 등으로 표현한 광초는 캔버스에서 터져 나오거나, 거꾸로 치솟고, 폭포처럼 줄줄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상에 최헌기 자신만의 해석을 붙였지만 정작 관람객은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상상하면서 고정된 사고방식을 스스로 뒤집게 되는 것으로, 그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사상도 자본주의의 욕망도 사람을 구원해주지 못하니 믿을 것은 예술가 자신의 강한 자의식뿐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크고 부드러운 손이 내게로 뻗쳐 온다. 다섯 손가락을 활짝 펴고 거룩한 바다가 내게로 밀려온다. 인간의 종말이 이처럼 충만한 것임을 나는 미처 몰랐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박목월(1915-1978) 시인의 유고시집에 실린, 시인의 대표적인 신앙시로 꼽힌다는 ‘크고 부드러운 손’이다. 최헌기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경계인이라면 종교-인종-국적-남녀성별-연령-계층이라는 경계를 다 허물고 자연인-우주인 ‘코스미안’으로서의 강한 자의식을 갖게 될 때 박목월 시인이 예견한 인간의 종말은 참된 인간의 시원(始原)이 되어 충만한 코스모스바다의 품에 안길 수 있으리라. 이것이 우리의 참된 구원(救援)이리. 우리 가수 추가열의 ‘소풍 같은 인생’ 다 함께 불러보자.
너도 한 번 나도 한 번
누구나 한번 왔다 가는 인생
바람 같은 시간이야
멈추지 않는 세월
하루하루 소중하지
미련이야 많겠지만
후회도 많겠지만
어차피 붙잡을 수 없다면
소풍 가듯 소풍 가듯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야지
“삶은 고통이죠.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거죠.”
몇 년 전 서울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 기자 간담회에서 미국 출신의 세계적인 비디오 예술의 거장 빌 비올라(Bill Viola 1951 - )가 한 말이다. 전시작 중 ‘물의 순교자(Water Martyr)’와 ‘도치된 탄생(Inverted Birth)’에 관해서였다.
세계적인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조수로 활동했던 비올라가 그가 만든 이미지를 느림의 미학에 적용한 작품을 갖고 지난 2015년 3월 방한했었다.
“물의 순교자’는 2014년 5월 영국 런던 세인트 폴 성당(St. Paul Cathedral)에서 선보인 대형 비디오 영구 설치작업인 ‘순교자(흙, 공기, 불, 물)/ Martyrs(Earth, Air, Fire, Water)’의 하나이다. 그는 “순교자의 그리스 어원은 ‘증인’을 의미한다. 오늘날 대중매체가 현대인들을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증인으로 만들고 있다”며 “이 순교자들의 모습을 보면 고통과 역경, 죽음을 극복하면서까지도 가치나 신념을 지키려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소개했다. 이어 “이 작품에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행동이나 의지, 인내력, 희생의 가치”라고 부연했다. “사람은 신념이나 가치를 위해서 고통이나 역경을 극복할 수 있고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5m에 달하는 대형 스크린에 영사된 ‘도치된 탄생’은 검은 액체를 뒤집어쓴 한 남자가 나중에 깨끗한 물로 정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인데, 마지막에 나타나는 부드러운 안개는 수용, 각성, 탄생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는 백남준에 대한 기억도 떠올렸다. “내 평생 그런 분은 처음이다. 재미있고 아름다운 분이었다. 노인이나 청년, 어떤 사람에게도 마음이 열려 있었다. 당시 비디오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도록 헸다. 백남준 선생은 내 인생의 최고의 사람”이라고 기억했다. 비올라의 2008년 작 ‘받아들임(Acceptance)’은 원효대사가 했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태어나지 마라. 죽는 것이 괴롭다. 죽지 마라. 태어나는 것이 괴롭다.”
이는 ‘태어나라. 사는 것이 즐겁다. 죽으라. 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놀랍다’는 원효대사의 반어법이 아니었을까. 삶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있어 재미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능하지 않나. 어둠이 있어 빛이 있고, 고독을 모르면 사랑을 알 수 없듯이 말이어라.
진실로, 신(神)의 불꽃이 슈베르트 속에 살아 있다. (Truly, in Schubert there dwells a divine spark.) 이렇게 1927년 베토벤은 탄성을 내질렀다고 한다. 1815년 슈베르트가 18세 때 괴테의 시 ‘첫사랑의 실연(Erster Werlust/ First Loss)’의 시구 “혼자 내 상처를 어루만지네(Einsam nah rich meine Wunde/ Alone I nurture my wound)”를 노랫말로 작곡한 이 노래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젊은이의 애창곡이 되었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노래를 애창할 때 이 멜로디는 우리를 또한 아름다운 노래로 만들어 준다. 우리 자신 속에 깊이 내재하는 자의식을 일깨워준다. 슈베르트의 음절 한 소절 한 소절이 더할 수 없도록 애달픈 사랑의 극치를 느끼게 해 준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의 말을 빌리자면 “노래로는 말로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 요술처럼 시인이나 작곡가가 꿈도 못 꾼 신비스러운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 세상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보배를 찾게 해 준다. (With songs one can express so much more than the words directly say, the magic can take over and the treasure can be hauled up, taking us to places poet or composer may never even have dreamed of.)”
이란 태생이지만 영국에서 교육받고 영어로 시를 쓰는 미미 칼바티(Mimi Khalvati 1944 - )의 시 “내가 풀이고 그대가 바람이거든 나를 거쳐 불어주오. (If I am the grass and you the breeze, blow through me.)’를 우리 다 함께 암송해 보리라.
내가 풀이고 그대가 바람이거든 나를 거쳐 불어주오.
내가 장미꽃이고 그대가 새이거든 내게 구애(求愛)해 주오.
그대가 노랫말 운율이고 내가 그 시구 후렴(後斂) 노래
가사이거든 내 입술에 머물지 말고 내게 다가와 주오.
그럼 그대가 오라고 눈짓하는 대로 나 그대에게 다가가리오.
부드러운 장갑 낀 그대의 강철 같은 손으로 쏜 화살이 날아와
내 가슴을 꿰뚫거든 내 온몸에 문신(文身)을 새겨 주오.
내 말이 독사의 꼬리처럼 독을 품었거든
그대의 주술(呪術) 같은 매력으로 날 사로잡아 주오,
내가 그대의 왕관 월계관 잎이거든 그대는 날 전혀 모르는
내 나무껍질 가지일 뿐이라오.
아, 내가 그 나무껍질이었더라면 좋았을걸
오래되었어도 아직 나뭇잎이 피는
그럼 그대는 내게 맺히는 이슬로 내 그늘에 머물 것을
그대가 원하는 여인으로 그대와 결혼하려면
내가 어떤 형상과 모습을 해야 하나요.
그대는 내 그늘에 쉴 독수리, 내 불꽃에 달려들 불나방이거든
내게로 어서 날아와 주오.
그대가 서쪽에서 숨질 때 내가 동쪽에서 살아난다면
사랑하는 나의 님이여, 매일 밤 밤이면 밤마다
나를 새롭게 살려주기 위해 그대가 죽어 주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일이 끝나면
우린 그냥 좋은 친구로 남는다오,
나의 영원한 벗이자 음악의 신 뮤즈요 애인이며
나의 ‘루미’에게 ‘샴수딘’ 남자아이의 이름으로
이슬람 종교의 태양 (Sun of the religion)이란 뜻인 그대여.
나의 하늘과 땅이 되어 주오
그러면 나는 본래의 나보다 두 배로 내가 되리오.
그대가 내게 세상의 반만 되어줄 수 있다면,
If I am the grass and you the breeze, blow through me.
If I am the rose and you the bird, then woo me,
If you are the rhyme and I the refrain,
don’t hang on my lips, come and I’ll come too
when you cue me.
If yours is the iron fist in the velvet glove
when the arrow flies, the heart is pierced, tattoo me.
If mine is the venomous tongue, the serpent’s tail,
charmer, use your charm, weave a spell and subdue me.
If I’m the laurel leaf in your crown,
you are the arms around my bark, arms that never knew me!
Oh would that I were bark! So old and still in leaf.
And you, dropping in my shade, dew to bedew me!
What shape should I take to marry your own, have you
hawk to my shadow, moth to my flameㅡpursue me?
If I rise in the east as you die in the west,
die for my sake, my love, every night renew me.
If, when it ends, we are just good friends, be my Friend.
muse, lover and guide. Shamsuddin to my Rumi.
Be heaven and earth to me and I’ll be the twice the me
I am, if only half the world you are to me.
이 시에서 카바티는 시 속의 애인을 쫓는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의 애인, ‘사랑의 대상’이 되길 바란다. 그러면서 이 시 속 애인들은 사랑하는 대상에게 여러 가지 다른 시나리오를 시도하고 있어라. 풀과 바람처럼 사랑은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고요하고 달콤하며, 언제나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예시한다. 여기서 우리 ‘받아드림’의 역설(逆說)을 살펴보리라.
실연의 아픔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사랑의 기쁨을 맛보게 되고
이별의 슬픔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영원한 추억을 간직하게 되며
받아들이기 전에 비워야 하고
비울 때 채워지지 않던가.
내가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의 전부를 내주는 것이리라.
이수명의 시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를 우리 또 함께 음미해 보리라.
자신을 찍으려는 도끼가 왔을 때
나무는 도끼를 삼켰다.
도끼로부터 도망가다가 도끼를 삼켰다.
폭풍우 몰아치던 밤
나무는 번개를 삼켰다.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더 깊이 찔리는 번개를 삼켰다.
현재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공황장애(恐慌障碍 panic disorder) 상태이지만 선견지명(先見之明)이라도 있었을까. 얼마 전부터 미국의 청소녀, 청소년들의 유행어가 ‘제기랄 난 아무것도 (할) 수조차, (알) 수조차, (상상할) 수조차 없네’란 뜻으로 (I can’t even. I’m unable to even. I have lost my ability to even. I am so unable to even. Oh, my God. Oh, my God!)’이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젠 총체적으로 파산에 직면한 온 인류의 비명(悲鳴)에 가까운 넋두리가 될 줄이야!
어째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빌 게이츠(William Henry Gates III 1955 - )의 “코로나/코비드-19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What is the Corona/ Covid-19 Virus Really Teaching us?”란 메시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으리라. 14개 항목으로 된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상기(想起)시키고 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그렇듯이) 우리 모두 이 바이러스 앞에서 평등하다는 것. 사람들 사이에 어떤 국경이나 경계도 있을 수 없고 우린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동안 우리가 망각해온 건강한 삶의 중요성. (인생무상) 삶의 유한성(有限性)과 허무성(虛無性)을 각성 인지하고, 우리 서로 도와 삶을 공유(共有)해야 한다는 것. 우리 인류사회가 물질문명에 오염되고 불필요한 사치품에 중독되어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인 물과 식료품 및 질병을 치료할 약품을 등한시(等閑視) 해왔다는 것. 끊어지고 멀어졌던 가족 간의 긴밀한 유대를 회복하는 것.
우리의 진짜 직업이란 우리 각자가 하는 일이 아니고 우리가 서로를 돌보고 보살펴 서로를 이(利)롭게 하는 것. 인류가 (그 누구든) 아무리 과대망상(誇大妄想)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바이러스가 한순간에 회전하는 지구를 정지시킬 수 있다는 것. 우리에게는 자유의지(自由意志가 있어, 상부상조(相扶相助)해서 상생(相生)의 길 아니면 사리사욕(私利私慾)으로 우리 모두의 자멸(自滅)의 길, 둘 중 양자택일(兩者擇一)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 (토끼가 제 방귀 소리에 놀란다고) 우리가 인류역사상 늘 당면하고 극복해온 수많은 위기 중 하나인 이 바이러스 역병(疫病)에 당장 인류의 종말(終末) 말세(末世)라도 닥친 듯 혼비백산(魂飛魄散)해 사태를 더욱더 악화시킬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침착하게 대응 대처할 수 있다는 것.
이 위기와 사태가 정말 종말(終末)이 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개과천선(改過遷善)함으로써 새로운 시원(始原)이 될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자연환경, 자연과 기후를 파괴하고 오염시킴으로써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지구라는 별 자체가 심하게 병들었기 때문에 우리 또한 중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 해법(解法) 없는 문제란 없는 법. 그러니 패닉하지 말고 계절이 바뀌듯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 많은 사람들이 이 코로나바이러스를 큰 재앙(災殃)으로 보지만 나는 이를 하나의 좋은 교정기(矯正機) 축복(祝福)으로 여긴다는 것.
이상과 같은 여러 마디를 단 한마디로 내가 줄이자면 ‘우린 너 나 할 것 없이 다 하나’라는 것이고, 이를 또 한두 마디로 부연하자면 우리 동양의 선인들이 일찍부터 명명백백히 단순명료하게 밝힌 ‘피아일체(彼我一體)’와 ‘물아일체’ (物我一體)’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이 절망감은 전적으로 자신감이 결여된 회의와 냉소와 혼란과 당혹감(當惑感)의 발로인 것 같다.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표류하면서 너무 쉽사리 좌절하고 절망하고 포기하는 오늘날의 젊은이 아니 어린이들이 부모의 과잉보호로 심약한 악골들이 되어 쉽게 겁먹고 쉽게 상처 입고 쉽게 무기력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아니면 몇 년 전 한국에서 있었던 ‘잔혹 동시’ 논란에서 표출되었듯이 정신적인 폭력으로 발산하게 되는가 보다. 또는 또 몇 년 전 ‘천재 소녀 명문대학 허위 입학소동’ 에서처럼 부모의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견디다 못해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 입학했다고 자기최면이라도 걸게 되는 게 아닐까.
아, 그렇다면 일단 주사위부터 던져 볼 일 아니랴. 어차피 모든 것이 미지수인 마당에 매사가 하기 나름이고, 삶 자체도 살기 나름 아니던가. 심고 가꿔야 거두게 되고, 하늘을 봐야 별을 따게 된다고, 숨을 내쉬어야 또 들이마실 수 있다. 그러니 세상에 공짜란 있을 수 없지. 이 사실 아니 진실을 깨우치는 순간부터 삶다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리라.
이 점을 주지시키는 것이 교육의 전부라고 해야 하리라. 그렇지 않고 학교 교육이라는 것이 단지 학위나 졸업장으로 취직을 위한 스펙 쌓기나 수지타산, 계산계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이야말로 인간로봇을 생산하는 공장이라 해야 하지 않을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삶을 살아본다는 것은 아무 누구와 경쟁하는 것도, 남에게 내가 얼마나 성공하고 잘 사는지를 자랑하는 것도,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기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만큼 삶을 살아보는가가 아닐까. 다시 말해 삶을 얼마만큼 사랑해 보는가이리.
숨 쉬는 것부터, 눈 뜨고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온갖 경이로운 소리를 들어 보는 것,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 섹스를 즐겨 보는 것, 연애를 하고 실연도 당해보는 것, 결혼도 하고 또 하게 되면 이혼도 해보는 것, 이런 일도 저런 일도 다 해보는 것, 어떤 일을 도모했다가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는 것, 내 자식 남의 자식 가리지 않고 키워본다는 것, 젊어 보기도 하고 늙어보기도 한다는 것, 눈을 감고 잠을 자면서도 꿈까지 꾸어본다는 것, 그리고 살다가 죽어본다는 것, 이 모두가 다 얼마나 기적 같은 일들이고 더할 수 없는 축복인가. 이 외에 우리가 뭘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체코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해온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 )가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다. “유머 센스가 있는 사람은 믿을 만하다. (A sense of humor was a sign that a person could be trusted.)”고, 그의 2013년 작 중편소설 제목도 반어법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무의미한 축제(The Festival of Insignificance)’이다.
축제(祝祭)란 영원하지 않고 잠시 지속될 뿐이라면 다양한 놀이를 우리 각자 성향대로 식성대로 취향대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만큼 해보기다. 백인백색(百人百色)이라고 음식도 다 한 가지 맛일 수 없고, 무지개도 단 한 가지 빛깔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우리 각자가 좋아하는 만큼, 사랑하는 만큼, 맛보는 만큼, 꿈꾸는 만큼, 살아보는 것이 각자의 삶이 되리라.
축제의 존재 이유가 즐기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아르헨티나의 시인 안토니오 포르키아(Antonia Porchia 1885-1968)가 했다는 말을 우리 각자 심사숙고(深思熟考)해 보리라.
“내가 네게 뭘 주었는지 알지만, 네가 무얼 받았는지 난 모르겠다. (I know what I have given you…I do not know what you have received.)”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1230ts@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