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오천이백 년 전 인간 ‘태호’다. 내가 태어난 곳은 몽골고원과 티베트고원으로 둘러싸여 날씨는 따뜻하고 다습해 농사가 잘되고 사람들은 온화한 성품을 지닌 곳이다. 어느 시절 열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비가 내리더니 대홍수가 났다. 집이 떠내려가고 짐승이 떠내려가고 사람이 떠내려가더니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두 떠내려갔다. 보이는 건 온통 흙탕물뿐이었다. 나는 표주박 안에 들어갔다. 표주박 안은 아늑하고 안전했다. 표주박에 숨은 나는 하염없이 떠내려갔다. 몇 날 며칠을 떠내려갔는지 기억도 없다. 그렇게 표주박 안에서 멈춘 세상만 기억하다가 드디어 비가 그치고 표주박 밖으로 나왔다. 대홍수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나는 되살아났다.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고 사람들은 나를 ‘복희’라고 불렀다.
다시 살아난 나는 우리 부족이 겪는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다툼이 일어나면 다툼의 원인을 찾아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분석하고 바로잡아 화해시켰다. 홍수가 나면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사람들과 협동하여 둑을 쌓아 물이 넘치는 것을 막았다. 우리 부족에게 일어나는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소통했다. 사람들은 나의 인품과 지도력을 존경했다. 그런 나를 보며 우리 부족의 최고 어른이 나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이제 우리 마을의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했다고 마을에서는 큰 잔치가 열렸다. 새로운 지도자에 대한 기대감으로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젊은 지도자로서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혁신가가 되어야 했다. 나는 세상을 혁신해 나가며 이 나라의 왕이 되었다.
강가에 앉아 하늘을 한없이 우러러보았다. 하늘은 높고 푸르러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처럼 신성한 하늘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땅을 세심하게 살폈다. 날아다니는 새를 유심히 보고 짐승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무늬도 살펴보았다. 사물과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지를 관찰했으며 내 몸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뜰하게 살폈다. 그렇다. 나는 뛰어난 관찰자다. 앎을 향한 나의 여정은 끝이 없었다. 아주 작은 풀씨부터 저 우주까지 나는 궁금하고 또 궁금해 그 궁금증을 멈출 수 없었다. 그게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며 이 땅에 태어난 이유였다.
이런 관찰은 정신의 지평을 넓혀 주었고 앎의 깊이를 더해 주었다. 내 지도력은 이런 바탕 위에서 피어난 피나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자 신성한 기운이 막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내 몸으로 들어온 기운은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 새로운 에너지를 넣어주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 강과 저 산과 저 들판과 저 동물들과 식물들까지도 새로운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있었다. 천지가 개벽하듯 몰려오는 기운들을 온몸으로 받으며 나는 이 나라를 통치하는 길을 열며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빠졌다. 천지는 고요하고 오직 나만이 이 강가에서 홀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눈을 뜨자 갑자기 강에서 용의 머리를 하고 말의 몸을 지닌 용마가 나타났다. 용마는 물을 차고 허공으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나는 너무 놀랐지만 침착하게 용마를 바라보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용마의 등에 쉰 개의 점이 어떤 무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늬를 보는 순간 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갑자기 모든 것의 의문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던 하늘과 땅은 왜 생겨났으며 사람은 왜 태어났는가 하는 의문이 하나하나 풀리는 듯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간절하면 이루어지는 법인가 보다. 나의 간절함은 하늘에 가 닿았고 그 하늘은 내게 우주 만물의 이치와 인간의 길을 알려 주었다.
한 덩어리로 있던 것이 둘을 낳았다. 둘은 다시 셋을 낳았다. 하나는 밝음이다. 하나가 낳은 둘은 어둠이다. 우주는 하나로 끝없이 이어지는 양의 기운이며 그 하나에서 갈라져 나온 둘은 양을 바쳐주는 음의 기운이다.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가 낳은 둘은 땅이며 둘이 낳은 셋은 사람이다. 하늘과 땅과 사람은 세 개의 원리로 돌아간다. 세 개는 여덟 개의 수를 만들 수 있다.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현상과 관계성을 지닌다.
이어지는 것과 끊어지는 것이 세 개씩 겹칠 때 팔괘가 성립된다. 팔괘는 만물이 생성되어 전개되는 근원이 되고 그 근원은 천지를 낳고 천지는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낳았다. 나는 네모난 단에 앉아서 팔방에서 들려오는 음악을 들었다. 하나에서 둘이 되고 둘에서 셋이 된다. 이 셋은 우주의 기본원리다. 셋은 여덟 개의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있다. 그 여덟은 하늘, 연못. 물, 불, 천둥, 바람. 산, 땅이 된다. 이 팔괘에는 만물의 이치가 다 들어 있어 자연계와 인간계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 우주는 흐름이다. 역(易)이다. 변화하고 흐르고 바뀌는 것이다.
나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멀리 새 한 마리가 하늘을 휘저으며 날아가고 있었다. 방금 날아가던 새는 보이지 않고 파란 하늘만 펼쳐져 있었다. 아득한 옛날과 같이 지금도 천지는 의연한데 천지 만물은 자연의 의지대로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앎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그 앎의 길은 천지에 가득 차 있다. 우주는 끝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변화와 발전은 순환하고 그 과정에 우리 인간은 번성하다가 쇠하고 쇠하다가 번성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깨우쳤다. 나는 지도자로서 국가를 운영하고 국민을 편안히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를 만들고 즐거운 음악을 만들었다.
우주의 질서를 발견하여 하늘의 도를 계승하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밝힌 나는 지혜와 정의를 바탕으로 절제력을 갖춰 강인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봄과 생명을 관장하는 신이라도 받들었다. 내가 대지에 나타나면 대지는 다시 소생하고 만물이 자라나는 봄이 온다고 믿었다. 나는 인류의 시작이며 생명의 신으로 150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내가 죽고 나서 사람들은 나를 동방의 천제라고 불렀다. 나의 제자 구망과 함께 만 이천리나 되는 땅을 다스리면서 봄날의 주신(主神)이 되었다.
그렇다. 사람들은 나를 신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렴 어떠하랴. 나는 신화로 박제되었고 역사로 기록되었다. 처음, 하늘의 코드를 창안한 나의 우주론적 철학 위로 인간로드는 계속될 것이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