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2년 5월 7일(이하 음력)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인 옥포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지휘한 조선수군은 압도적 승리를 했다. 5월 4일 새벽 여수의 전라좌수영을 출발한 이순신 휘하의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은 소비포(경남 고성군 하일면 동화리)에서 1박 하고 다음 날 당포(경남 통영시 산양읍 삼덕리)로 진출했다. 여기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4척과 협선 2척이 합세하여 연합함대를 구성한 조선수군은 한산도 북쪽을 경유하여 5월 6일 거제도 남단의 송미포(거제시 남부면 다대리)로 진출했다.
적이 가덕도 방면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순신 장군은 5월 7일 이른 아침에 대규모 선단을 이끌고 가덕도 방면으로 북상했다. 이순신 연합함대는 첨자진으로 항진하면서 본대 전방에 척후선 두 척을 내세워, 적을 발견하면 신호탄인 신기전을 쏘아 올려 본대와 교신하기로 약속했다. 송미포에서 출발한 이순신 연합함대는 도슬포(현 도장포), 조라포(현 구조라), 지시포(현 지세포)를 경유하여 정오 경에 양암(현 거제시 능포동 양지암 등대)으로 진출했다.
이때 전방 척후선으로부터 신기전이 하얀 연기를 뿜으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적을 발견했다는 신호다. 신기전은 자체 탄약통을 달고 로켓 추진 방식으로 날아가는 화살이다. 이순신 장군은 즉각 전투 준비에 돌입하면서 장졸들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태산같이 신중하게 행동하라(勿令妄動 靜重如山)"는 명령을 내렸다.
토도 다카도라가 이끄는 일본군은 옥포(현 거제시 옥포동)에 상륙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노략질을 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옥포만에는 30여 척(임진장초 기준)의 적선이 정박해 있는데, 형형색색의 깃발을 달고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일자진을 펼쳐 적의 퇴로를 차단한 채 옥포만 안쪽으로 압박해 들어갔다. 선봉장에는 자기의 관할구역인 옥포를 버리고 원균과 함께 도망 다니던 옥포만호 이운룡이 나섰다.
새까맣게 몰려오는 조선수군을 바라보던 왜군은 놀라서 허겁지겁하다가 6척의 아다케부네가 선봉선으로 나서서 응전해 왔다. 포격전을 위주로 하는 조선수군은 적이 유효사거리 내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일시에 발포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화살도 적선을 향해 날아갔다. 순식간에 옥포만은 화염과 연기로 뒤덮이고 적선은 굴비를 엮어 놓은 형상으로 무리 지어 옥포만 북쪽 해안을 따라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했다. 여기서 적선 26척이 격침되고 나머지는 가덕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날 전과를 살펴보면 적선 26척이 격침되고 약 3,000명 이상의 왜군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적장 토도 다카도라는 침몰하는 배에서 뛰어내려 가까스로 옥포만 북쪽 해안의 절벽으로 기어올라 육지로 도망갔다. 반면 조선수군은 사망자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손실을 입은 배 역시 단 한 척도 없었다.
두려움 속에서 여수를 출발한 조선수군은 압도적 승리를 했고, 이날 옥포만에는 감격의 눈물과 함께 함성이 하늘과 바다를 뒤흔들었다. 이 소식은 의주로 피난을 가던 선조에게 전해졌고 연전연패하던 조선 육군에게 희망을 전하는 기쁜 소식이었다. 옥포해전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실로 크다. 최초의 압도적인 승리를 통하여 조선수군에게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계속되는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한 번도 패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일까. 이순신 장군은 선조에게 올린 승전 보고서인 옥포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서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죽을힘을 다해 싸웠습니다(一心憤發 咸盡死)"라고 했다.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필사즉생의 정신으로 싸워 이겼다는 말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보면 이순신 장군은 여수에서 옥포로 출전하면서, 소비포와 송미포에서 각각 1박 했다. 숙영지로 택한 이 두 곳의 지형을 살펴보면 적에게 쉽게 노출되지 않는 은밀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은 전장의 지리와 지형을 꿰뚫고 있어야 하고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
이동 중 본대와 척후선 간의 연락을 위하여 신기전이라는 통신 수단을 적절하게 활용한 것도 주요한 승리 요인 중 하나다. 적의 소재를 멀리서 알려 즉각적인 전투준비를 가능하게 했다.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은 전투 현장에서 사격통제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발 사고가 있어서도 안되고 일제사격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누구도 중구난방의 사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으로 봐야 한다.
다음은 옥포만의 지형을 감안하여 일자진을 펼쳐 포위망을 구축한 것이다. 일자진은 일렬횡대 대형으로 진을 유지한 채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포위 공격을 펼치는 진법이다. 평소 각고의 노력으로 여수 앞바다에서 진법훈련을 한 결과, 입구가 넓은 옥포만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일자진을 칠 수 있었다.
다음은 함대 구성이다. 전투선인 판옥선 외에 평소 4~5명이 승선하는 비무장 연락선인 협선 17척도 일부 무장을 시켜 함께 출동했다. 작은 고기잡이배인 포작선은 민간 동원선이거나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해상 의병으로 봐야 한다. 이런 포작선이 무려 46척이나 전투선 뒤에 따라붙었다. 협선과 포작선이 합세하여 대규모 선단인 것처럼 보이게 하여 적의 위세를 꺾는 데 한몫했다.
이처럼 사전에 준비하고 적절한 전략을 구사한 지휘관의 역량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수군은 모두 하나가 되어 죽을힘을 다해 싸웠고, 임진왜란 첫 해전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