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평양기생>이 역사 속의 기생을 불러냈다. 주제가도 같은 제목이었다. 1966년 세상에 나온 이 영화 주제가는 우리 대중가요사의 살아 있는 증인, 국민가수 이미자 선생의 목청을 타고 넘었다. 큐~ 마이크를 잡은 감독은 사극(史劇)을 주로 제작하던 이규웅 선생이었다. 음반은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하였으며, 동양라디오에서 방영한 인기드라마를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영화 줄거리는 관기(官妓)와 의적(義賊)이 봉건지배계급에 대하여 저항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정통사극이었다. 신영균과 김지미가 주연하였고, 박암·서영춘·전계현·최남현·주선태 등이 열연했다. 1966년 서울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영화다. 내 낭군 알성급제 빌고 또 비는, 평양기생 일편단심 변함없다오~.
무정 터라 한탄 말고 욕하지 마소 / 진정으로 임을 위한 거짓말인데 / 행여나 변할까 봐 마음 조이며 / 내 낭군 알성급제 빌고 또 비는 / 평양기생 일편단심 변함없다오.
<평양기생> 영화는 민초들의 가슴을 호쾌하게 뚫어주었다. 주인공 초선(김지미 분)은 호색한(好色漢) 평양감사의 시달림을 받아온다. 그래서 그녀는 정혼(定婚)한 사이인 권룡(신영균 분)을 찾아가 은거한다. 하지만 권룡은 무위도식하는 반건달, 이에 그녀는 다시 관기로 나선다. 그러던 어느 날 의적(義賊)이 된 권룡이 평양감영을 습격해오지만 체포되어 옥에 갇힌다. 이때 암행어사가 출두하여 감사를 파직시키고, 권룡은 옥에서 풀려나와 초선이와 짝을 맺고 무관(武官)으로 등용된다. 노래 속의 화자인 기생은 절개와 지조를 일편단심으로 삼고 살아가는 아낙네다.
이 영화는 봉건시대와 식민지 시절을 관통해 온, 조선 기생문화를 풍자한 작품인데,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 대한 저항과 양반으로 통칭되던 사대부 중심의 사회풍조에 대한 각성적 문화예술품으로 봐야 하리라. 그 시절 기생들은 노리개감이고, 기방(妓房)의 상업적 수단이었다.
1915년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부는 조선 식민지배 5주년을 기념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을 때, 광고 포스터에 경복궁과 조선총독부를 배경으로 하는 기생들의 사진을 실어서 배포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느 기자는 예리한 문체로 비판의 글을 남겼었다.
‘도대체 기생이란 무엇에 쓰는 것이냐? 또 한 번 물어보자. 그 쓸모란 자못 다종다양의 굉장한 것이다. 신사(神社)의 회합에, 부랑자유탕(浮浪者遊蕩)에, 코 큰 양반 접대에, 일본인 아첨에, 대관 초대에, 농사지어서 많은 이익을 냈다고 술을 먹는 자리에, 농사지어서 망했다고 화가 나서 술 먹는 자리에, 야구단이니 축구단이니 하는 환영 석 상에, 무슨 사회 창립회니 중역회니 심지어 양말(洋襪, 맨발에 신는 것)직공 위안회에까지도 기생이 있어야 한다.’
기생을 이렇게 상품화한 것은 일본제국주의 압제 속 근대의 터널이었다. 그 당시 기생들은 1시간당 1~1.2원의 수입을 올렸다. 한 자리에서 3~4시간 일을 했는데, 그 시절 쌀 1가마에 7~8원이었고, 기생들 한 달 수입은 200~300원이었단다. 2절 노랫말은 더욱 절절하다.
외로워도 고달파도 참아주세요 / 이 모두가 임을 위한 거짓부린데 / 행여나 버릴까 봐 가슴 조이며 / 추야장 긴긴 밤을 홀로 새워도 / 평양기생 일편단심 변함없다오.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부는 1926년 평양기생학교(평양기생양성소)를 설립하였다. 3년 과정이었으며, 1934년 당시 1학년(가곡·서화·수신·창가·조선어·산술·국어), 2학년(우조·시조·가사·조선어·산술·음악·국어·서화·수신·창가·무용), 3학년(가사·무용·잡가·창가·일본패·조선어·국어·동서음악·서화·수신·창가) 등이었다. 이때, 국어 과목은 일본어일 것으로 추정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내 나라 내 땅에 살면서, 남의 나라말을 국어(國語)라는 과목으로 학습을 했으니. 빼앗긴 들에 철을 잃어버린 꽃이었던가.
먼 옛날 조선 시대 기생 배출지역은 서울·평양·성천·해주·강계·함흥·진주·전주·경주 등이었고, 평양기생이 최고였단다.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이 말은 조선시대 평안도관찰사가 평양에 있었고, 당시 평양의 관기(官妓)가 어떤 지역 기생보다 미모와 재능이 뛰어났다는 속설(俗說)에서 유래했단다. 이것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시대까지 이어져서, ‘화류평양·가수평양’으로 알려졌으니, 얼마나 갸륵한 슬픔인가. ‘남진주 북평양’이란 말에는 진주의 논개(論介), 평양의 계월향(桂月香)이 함의 되어 있고, 조선 기생은 일강계(一江界), 이평양(二平壤), 삼진주(三晋州)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강계는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임시수도이기도 했다.
여기서 남진주(南晉州)의 주인공 논개(1574~1593. 본명 주논개)는 임진왜란 당시 제2차진주성전투(음력 1593.6.22.~6.29)에서 순국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1532~1593)장군의 정실부인이었다. 그녀를 기생(의기, 義妓)으로 추념하는 것은 재고해야 할 역사의 과제다. 장수 출생인 그녀는 기생이 아니라, 1593년 7월 칠석날 진주 촉석루에서 벌어진 왜군들의 승전 축하연에, 남편 최경회 장군의 복수를 하기 위하여 기생 복장을 하고 참석하였다가, 왜놈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남강 의암(義菴)으로 유인하여, 그를 끌어안고 강물에 투신 순국한 의녀(義女)이다. 그녀의 시신은 남강 지수목 근처에서 인양되어, 오늘날 경남 함양 금당리에 묘소가 있음이다.
평양기생학교 출신, 기생 중의 한 사람이 바로 가수 왕수복(1917~2003)이었다. 그녀는 1933년 폴리돌레코드회사에서 발매한 <고도의 정한>으로 스타가 된다. 그녀는 1931년 기생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6살이던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 전속가수로 데뷔했다. 그 시절 잡지사인 『삼천리』사가 1934년에 개최한 전조선 인기가수 투표에서 <목포의 눈물> 주인공 이난영(1916~1965) 제치고 1등을 한 유명 가수였다. 해방광복 직전이던 1940년대 서울에는 2천여 명의 기생이 있었다. 한성권번·다동권번 등이 그들의 주요 생거지였다. 권번은 1914년 일본제국주의 조선총독부가 명명한 기생조합의 다른 이름이다.
조선 시대 이후 이어져 온 기생문화, 그 시절 평양감사가 부임하면 대동강 연광정에서 연회를 개최하는 봉건적 관습이 있었다. 연광정(練光亭)은 대동강 변 대동문 근처 절벽 위에 있는 누각이다. 관서팔경의 하나로 이곳에 최초로 누각이 지어진 것은 고려 시대 1111년, 당시에는 산수정(山水亭)으로 부르다가 연광정으로 변경하였으며, 1670년 새로 지은 북한 문화유물 제16호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평양까지 공격해 온 왜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와 명나라 심유경(?~1597)이 전쟁 중 회담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1609년에 사신으로서 방문한 명나라의 서화가 주지번(朱之蕃)이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이라고 쓴 현판을 내걸었는데, 병자호란(1636) 당시 청태종(1592~1643)이 앞의 천하(天下)글자를 잘라 버렸단다. 그래서 이후 두 글자를 다시 써 붙여서 지금은 두 글자의 필체가 다르단다.
방랑시긴 김삿갓(김병연, 1507~1563)이 이곳을 지나면서 읊은 평양기생과 주고받은 문답 시를 보면, 평양기생의 시문필력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김삿갓이 지나가던 날은 마침 평양감사가 주관하는 연회 날이었고, 매향이라는 기생과 마주 앉아서 읊은 시다. ‘평양기생은 능한 바가 무었이뇨/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시 또한 능하오/ 능하다 능하다 해도 별로 능한 것도 없네 그려/ 달 밝은 밤에 지아비 부르는 것이 능하외다.’
대중가요 유행가 <평양기생>에 역사의 소맷자락을 펼쳐보니 그 곡절이 오롯해진다. 노래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노래 속의 세상은 사람들 삶이고, 그 삶이 아우러져 역사의 마디가 된다. 세상을 펄럭거리게 하는 유행가 리메이크 열풍, 새 노래 탄생 소식은 깜깜하고, 흘러온 노래만 앵무새처럼 뇌아리는 기획·연출·가객들의 새 노래는 언제쯤 마주할 수 있을까. 2023년 이 풍진(風塵) 자유 대한민국을 컬컬하게 풍자하는 새 유행가의 깃발을 흔들 예술가는 언제 오시려나.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