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단양 청련암




단양 청련암

 

 

아파할 사랑 없는 생애가 부끄러운 저녁, 어둠은 쉬이 온다. 어둠속에서 질척거리는 세상은 척박한 농담처럼 재미없다. 문명의 불빛은 야멸차게 관능으로 흐르고 환청처럼 들리는 별들의 속삭임도 지리멸렬하다. 길을 떠나야 한다는 신호다. 길은 내게 경이로운 힘이다. 너를 찾아가는 희망의 정거장이며 닥쳐올 시간의 가깝고도 먼 저편이다. 나는 살찐 부르주아의 영혼을 안고 길을 나섰다. 저 뻔뻔하고 허무한 영혼은 염치도 없이 내 등 뒤에 달라붙어 나를 따라온다. 비라도 내렸으면 좋을 여름이다. 이 아득하고 기진맥진한 여름을 나는 미워할 수가 없다. 미워하지 않으려면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려면 사랑해야 한다. 무덥고 귀찮고 질긴 여름을 사랑하기 위해 나는 소백의 옛길 죽령을 넘었다.

 

소백을 두고 단양과 풍기는 마주한다. 마주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죽도록 사랑하지 않으면 마주할 수가 없다. 풍기에서 보자면 소백산의 뒤편은 단양이고 단양에서 보자면 소백산의 앞이 단양이다. 아무렴 어떠랴. 나는 무덥고 껄끄러운 여름을 끌고 죽령을 넘어 붉은 태양의 도시 단양으로 갔다. 세련되지 않은 인문의 길 죽령 너머로 단양이 햇살아래 졸고 있었다. 단양은 몇 번이고 와 봤을 터인데 기억이 단단하게 자리 잡아 있지 않다. 천혜절경이라는 칭송이 자자했던 단양의 풍경들은 여전하고 명승고적지마다 넘쳐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피서 인파를 뚫고 사인암으로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었다. 산모퉁이에 가지런히 피어 있는 산꽃들이 아롱아롱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데 나는 인파에 시달리고 더위에 매몰되어 쩔쩔 매고 있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 미련하고 얄팍하고 상투적이다. 간결하고 명랑한 삶이란 내 것이 아닌지 모른다. 깊고 간절한 마음이 가 닿을 곳의 궁극은 언제나 너무 멀리 있고 나는 사람과 사랑 사이에서 늘 외롭고 허전하고 괴로웠다. 그래서 건너지 못할 것들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단정 짓고 나니 명랑하고 간결한 삶의 뒤편으로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하지 마라.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서 괴롭나니…….’

사랑이라고 말하고 나니 법구경이 내 발목을 붙잡는다. 세상 참 묘하다. 사랑은 내 사유의 틀 안에서 언어의 집을 짓거나 이상의 날개를 펴는 진언이라고 믿었는데 사랑은 한갓 집착의 쓰레기에 불과하단다. 법구경이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법구경의 멱살을 잡고 깡패처럼 부처님께 따지고 싶었다. 허나 사랑의 본질을 내 미천한 앎으로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부처도 아승지겁을 건너다니며 겨우 깨달았을 것인데 인간으로 태어나 사랑이라는 단어로 평생을 목욕하며 사는 것은 축복 중의 축복이 아니던가. 그러니 나의 여름은 헛되지 않았고 나의 깨달음은 작지 않았다. 단양에서 나는 이렇게 아상에 취해 홀로 비틀거리며 청련암으로 갔다.

 

 

기기묘묘한 바위들에게 호위된 청련암은 풍경 그대로의 경전이었다. 남조천의 물길이 굽이굽이 휘돌아 들고 바람의 언어가 침묵이 되는 곳에서 수줍은 소녀처럼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이런 천 길 낭떠러지 앞에 서면 어느 일요일에 죽어버리자라는 마지막 시를 남기고 생을 마감한 전혜린이 떠오른다. 불우한 전혜린의 영혼을 닮은 저 비단결 같은 바위들에게선 삶과 죽음의 비릿한 냄새가 풍문처럼 떠돌다가 청련암 뜰 앞에 내려앉아 고요가 되는 것 같았다. 나의 관념은 의식 밖에서 나를 따돌려 놓고 가당치 않은 생각의 집을 지었다가 부쉈다 하며 꼴값을 떨 동안 청련암엔 여름햇살이 눈부시게 내리고 주승은 평상에 앉아 홀로 여름을 익히고 있었다.

 

고려의 나옹선사는 어떻게 이곳에 절을 지을 생각을 했을까. 절벽은 높아서 하늘은 보이지 않고 물길은 길고 깊어서 쉬이 건널 수 없는데 나옹선사는 신보다 사람을 사랑하여 청련암을 지었을 것이라 짐작하니 이 오탁악세의 세상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붉은 태양의 땅 단양에선 천지간에 불심은 인간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누구나 기댈 언덕 하나쯤 안고 살아야 했을 것이다. 부처라는 불생불멸의 언덕에서 사람들은 안심을 얻고 고통을 덜어 내며 한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산천은 말이 없고 역사는 유구해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는 법인가 보다. 역사처럼 인간처럼 시간처럼 모든 것은 사라지고 또 모든 것은 다시 온다. 전란에 사라지고 억불에 없어지고 풍파에 무너지면 누군가는 다시 짓고 다시 지으면 또 사라지는 소멸과 생성의 순환을 거듭하며 청련암은 오늘 이곳 사인암에 의연히 앉아 있었다. 늙은 공양주 보살의 굽은 허리처럼 청련암에서의 여름 한날의 오후는 가없고 가없이 적멸했다.

 

청련암에서 나는 차마 사랑이라는 말을 꺼내 놓지 못하고 대웅전 마당에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없이 방황하며 이천십이년형 캐논 카메라의 셔터만 눌려댔다. 피사체 안으로 들어온 부처가 내게 속삭였다.

 

사랑하라 사랑하면 해탈할 것이니…….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3.28 12:38 수정 2019.03.28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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