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이래로 이순신 장군은 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는 ‘이순신장군’ 하면 당연히 ‘세계4대해전’으로 일컬어지는 한산대첩과 기적의 명량대첩부터 떠 올린다. 그리고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조선을 구해낸 영웅적인 면을 먼저 생각한다. 당연하다. 그런데 이순신장군에겐 우리가 모르는 면들이 엄청나게 많고, 또 수많은 이들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리 없이 또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거의 궤멸되다시피 패전한 후,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 되었을 때 조선수군은 16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칠천량에서 대피한 12척을 회령포에서 인수 받을 때엔 120명으로 늘어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난길에서 이기기는커녕 살아남기도 어려운 마당에 이순신 일행을 만나고는 ‘나는 장군님을 따라간다. 나중 살아서 만나자’며 가족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그래서 조선수군이 재건(再建)되는 모습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기적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따라나선 이 땅의 이름 없는 백성들이었다. 그 당시의 조선은 그야말로 성리학의 국시(國是) 아래 신분제도가 공고화(鞏固化)된 시기였다. 겉으로 군자니 선비니 하면서 소인을 아래에 두고 거들먹거리기 일쑤였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천형(天刑)으로 천민과 노비는 거의 소유물(財産)이었으며, 노비의 생사여탈권 까지 가진 특권화 된 양반들의 세상이었다.
조선 개국 후 2백여 년간 특권을 누리며 평온한 삶을 구가하던 그때 임진왜란이 터졌다. 지배층이었던 대부분의 양반들은 왜군의 기세에 싸워보지도 않고 숨어버리거나 배를 침몰시키고 도망할 때 그 당시 천역(賤役)으로 외면당하던 수군들이 왜적을 깨뜨리고, 진정한 몇몇 선비와 이름 없는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사직(社稷)을 보존했다. 백성들이 울부짖을 때 임금이란 자는 새벽에 도망을 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지켜야 하는 현실을 생각한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버텨낸 명량대첩을 생각해 보자. 대장선 한 척이 133척이나 되는 적선을 앞에 두고 명량(울돌목)의 거센 조류를 버텨내고 있는 격군(格軍, 노를 젓는 사람)들의 피땀을 생각해야 한다. 앞서 임진왜란 초기의 승리로 나라를 구해내고 전사한 이들, 이순신이 전사자들을 각별히 챙기고 임금에게 올라가는 장계에 재산 가치에 불과했던 천민과 노비들의 이름을 일일이 적었고, 전쟁통에 역병으로 죽은 이들까지 제사를 지내준 것처럼 우리는 그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실 그들이 조선을 살린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모든 백성들을 사람으로 생각했고 대하였다. 군사작전에 관한 무엇이든 누구든 말할 수 있는 운주당(運籌堂)을 운영했고, 통제사의 신분으로 직접 화살을 다듬기도 했다. 이러함으로 인해 모든 군사들이 하나가 되어 기적이 아닌 당연한 승리(上下同欲者勝)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 후 전라좌수영에 조그만 키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타루비(墮淚碑)’가 바로 그것이다.
생각해 보면 신라 문무왕만이 동해를 지키는 용이 된 것이 아니고 칠천량에서 수장된 일 만여 수군을 비롯한 수많은 전사자들이 남해·서해의 용왕이 되어 침략군 전선(戰船)의 북진을 막은 것이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면서도 노를 젓다가 스러져간 사노비 붓동(夫叱同), 절노비 귀세(貴世), 토병 강돌매(姜乭每) 등등 전사자의 이름들이 이순신의 장계에 적히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어느 작은 스터디 모임에서 불러진다. 그들의 혼(魂)은 살아서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다가 죽은 뒤 4백여 년 지난 후 불러지면서 비로소 꽃이 되었다. 그들의 이름이 불러지던 강의실은 숙연했다.
이젠 우리 모두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임진왜란 당시 핏빛으로 피었던 진달래는 그때 그 모습대로 지금도 핀다. 우리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 그렇게 피워내야 한다.
이순신의 조선 수군들에게 한산대첩, 명량대첩의 승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전선(戰船)의 밑창에서 햇빛 한 점도 못 받고 죽으라고 노를 젓다가 죽어간 많은 혼들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영웅적 승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민초들을 우리가 끌어 올려야 한다. 그것이 이순신의 뜻이다.
‘호남이 없었으면 국가도 없었습니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이순신의 말이나 ‘경상도 바다는 우리 바다가 아닙니까?(嶺南獨非王土耶) 라고 소리친 녹도만호 정운의 기개가 곧 같은 의미이듯 장수와 격군, 의병장과 백성이 하나가 되어 초유의 왜란을 극복하고 나라를 구한 것이다. 이순신이라는 탁월한 조상을 둔 것은 엄청난 행운이지만 이름 없이 스러져간 격군, 노비, 천민들도 그 현장에 엄연히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분제의 조선을 완전히 넘어서야 한다. 소인(小人)과 군자(君子)의 구분 기준을 생각하며 전쟁 초기에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고급 관리들과 임금, 이에 비하여 소리 없이 일어난 의병과 수군의 격군들 중에서 과연 누가 소인이고 군자인가. 그런데도 작금의 행태를 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아직도 신분제의 잔재는 곳곳에 만연하고, 뭐든지 큰 것만 고집하고 1등만을 제일로 치는 것이 안타깝다.
지금도 우리 세상 곳곳에는 묵묵히 땀 흘리며 노를 젓는 격군들이 많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인연의 반복이다. 어느 날 그가 내가 되고 내가 그가 될 수도 있다. 삶의 여로(旅路)에서 동행만큼 큰 축복은 없다. 끌고 밀면서 서로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는 엄청난 힘. 그것이 동행이다. 동행해 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자. 돌멩이 하나, 잡초 한 포기까지.

[하진형]
수필가
칼럼니스트
교육부, 행정안전부 범죄안전 강사
이순신 인문학포럼 대표(이순신 국제센터)
제3회 코스미안상 금상
이메일 bluepol7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