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천팔백 년 전 인간 ‘길가메시’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바다를 향해 나란히 흐르는 두 강 사이의 넓고 비옥한 땅 우루크가 내가 다스리는 국가다. 이곳은 습지가 많아 생명이 번창하고 땅이 비옥하다. 사람들은 온순하고 큰 싸움이나 전쟁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이다. 걱정이 없으니 다툼이 없고 다툼이 없으니 평화는 지속되었다. 평화로운 날들의 지루함이 있긴 했지만 나는 백성을 사랑하고 국가를 지키는 왕으로서 국가경영을 원만하게 잘하고 있었다. 왕이란 직업은 때론 재밌고 때론 지겹고 때론 화가 나고 때론 무의미하기도 한 직업이라는 걸 가끔 느낄 뿐이다.
나는 거칠 것 없는 인간이다. 내가 거칠 것 없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따로 있었다. 나는 다른 인간들과 달리 반신반인(半神半人)이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능력과 강인한 인간의 능력이 내 핏속에 강물처럼 흐른다. 5미터나 되는 거구인데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신의 수저를 물고 태어났으니 무소불위의 막강한 능력을 누리는 건 당연하다. 그런 나에게 대항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나라 백성이 될 수 없다. 하늘도 내 것이고 땅도 내 것이며 강도 내 것이고 곡식도 내 것이며 신하도 내 것이고 백성도 내 것이다. 내 것 아닌 것은 이 땅에 존재할 수 없다. 나는 두려워할 것이 없다. 두려움은 저 어리석은 인간들의 것이다.
그런데 간혹 들려오는 소문이 있었다. 내가 오만하고 방자한 왕이라는 것이다. 내 통치가 무섭다고 벌벌 떤다는 백성들이 많다고 수군대곤 했다. 반신반인인 내가 이 정도의 권력도 누리지 못한단 말인가. 어차피 이 우루크는 나의 것이지 않은가. 내 통치는 백성을 위한 통치라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반란 세력이 있다는 증거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건이다. 풍문으로 떠도는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 애초에 싹을 잘라놔야 한다. 누가 감히 나에게 도전장을 내밀 것이란 말인가. 등 따습고 배부르니까 딴생각하는 인간들의 방자함이 가증스러워 나는 더욱 내 권세를 높이 쳐들었다. 인간들이란 한시라도 채찍을 휘두르지 않으면 말을 듣지 않는 개돼지 같은 존재라는 걸 잊을 뻔했다.
나는 백성들이 딴생각을 못 하도록 힘든 노역을 시켰다. 그중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바로 성벽이다. 백성들을 동원해 거대한 성벽을 쌓도록 명령했다. 백성들이 개미처럼 달라붙어 성벽을 쌓았다. 나의 권위는 저 단단하고 위대한 성벽으로 완성될 것이고 나의 권세는 땅으로 퍼져 나가고 하늘을 찌를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들은 내가 소유해야 할 재산이다.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도 원래 내 것이었기 때문이다. 사슴 같은 큰 눈망울에 꽃잎 같은 미소를 띤 여인을 보는 즐거움을 나 말고 누가 누린단 말인가. 여인들이 품어내는 천국의 맛을 감히 나보다 먼저 누린단 말인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내가 너무 방심한 탓인가 보다. 고분고분 말 잘 듣던 백성들이 배신하고 신에게 나를 고자질했다. 신들이 화가 나서 회의를 소집해 나의 맞수를 만들어 내려보자고 결론 지었다. 오! 나를 대적할 맞수라, 흥미로운 일이다. 올 테면 와라. 난 두려움 없는 천하무적 길가메시다. 지루하고 심심하던 차에 잘된 일이다. 그런데 신이시여 겨우 짐승들과 지내는 볼품없는 놈을 나의 맞수로 내려보냈단 말인가.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엔키두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우선 엔키두에게 아름다운 여인 샴하트를 보냈다. 동물들과 사는 인간이 오죽하랴. 인간이라는 맛에 길들면 그땐 겨우 나와 맞설 상대쯤 될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 샴하트가 숲으로 가서 엔키두에게 빵과 포도주도 주고 인간의 은밀한 성도 가르쳤다. 그러자 엔키두는 각성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맛에 길들고 있는 엔키두를 동물들은 동료로 인정하지 않기 시작했다. 엔키두는 샴하트를 따라 우루크로 돌아와 나에게 결투를 요청했다. 내 일상에 신선한 파문이 일어나는 순간이었다. 지루하고 재미없던 삶에 활기가 넘쳤다. 감히 나에게 덤비는 저놈을 능지처참시켜 주리라 생각하며 피 튀기는 싸움을 시작했다. 오! 신이시여 이게 무슨 일일까. 엔키두의 힘은 막강했다. 나를 대적할 만큼 힘이 쎈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나는 엔키두에 대한 묘한 마음이 자라라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대결로 시작된 우리는 라이벌에서 협력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신뢰가 쌓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신뢰는 의형제를 맺는 원동력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둘도 없는 형제처럼 서로를 신뢰하고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엔키두는 나에게 삼나무숲을 지키는 훔바바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훔바바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온몸에 돋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훔바바가 사는 그 땅을 차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엔키두와 의기투합해 삼나무숲으로 가서 불타는 눈을 가진 훔바바를 무찌르고 돌아와 그 기념으로 크고 강한 성전을 지었다. 그런데 전쟁과 사랑의 신 이슈타르가 나에게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변덕스러운 성격을 잘 알기에 구애를 거절했다.
이 변덕쟁이 여신은 나에게 앙심을 품고 하늘의 황소를 몰고 지상으로 내려오지만 나와 의형제 엔키두가 하늘 황소를 무찔러 버렸다. 오! 세상에 소갈머리 없는 신들이 이 일로 크게 노해 엔키두의 목숨을 거두가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공포와 분노의 충격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나의 의형제인 엔키두를 데려가 버리다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충격에 휩싸인 체 신들의 거주지 딜문으로 영원한 생명을 찾아 떠났다. 죽음의 바다를 건너 딜문에 도착하지만 자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우트나피쉬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결국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절망과 고통을 안고 떠나려고 길을 나셨다. 그때 우트나피쉬팀이 젊음을 되돌려 주는 불로초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 곧바로 불로초가 있는 바다에 도착해 불로초를 뽑아 들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던 뱀이 딸려 나와 불로초를 먹어버렸다. 뱀은 허물을 벗고 젊음을 되찾았다. 모든 것이 헛꿈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나는 우루크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런데 마음이 편했다. 나는 영혼의 친구 엔키두를 잃었지만, 지혜의 눈을 떴다. 그렇다. 나는 죽었지만 살았다. 뜨거운 낮이 지나고 차가운 밤이 오듯 삶은 덧없지만 죽음의 문턱을 넘어 불가능을 극복하고자 했던 나는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나는 신화의 옷을 입고
인간의 대서사시로 남았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
이메일 jmh1016@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