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수 칼럼] 사천해전의 경과와 승리 요인

이봉수

1592년 5월 7일(이하 음력) 여수 전라좌수영에서 제1차 출전을 감행한 이순신 함대는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40여 척의 적선을 격멸한 후 여수로 귀환하여 재정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왜적들은 점차 거제도 서쪽을 넘어 해안지방의 여러 고을을 분탕질하며 물자를 약탈해 가는 상황이 발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연락하여 6월 3일 제2차 출전을 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5월 27일 경상우수사 원균이 보내온 공문에 의하면 적선 10여 척이 이미 사천과 곤양까지 진출했다고 하였다. 사태가 급박함을 직시한 이순신은 우후 이몽구와 함께 5월 29일 전선 23척과 거북선을 동원하여 노량으로 진출했다. 이억기를 기다릴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님을 직감한 이순신은 군관 윤사공을 유진장으로 남겨 전라좌수영을 지키게 하고, 조방장 정걸은 해로의 요충인 흥양현(고흥반도)에 머물면서 각 진포를 지키게 조치했다.

노량에서 원균의 판옥선 3척과 합세한 이순신함대는 멀지 않은 해상에서 곤양으로부터 나온 적선 한 척이 해안을 따라 사천 방향으로 도주하는 것을 발견했다. 즉각 추격에 나선 방답첨사 이순신과 남해현령 기효근 등이 이 적선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적들이 배에서 내려 육지로 도주하자 배만 불태워 없앴다.

그 후 사천선창(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을 바라보니 약 400여 명의 왜군들이 지세가 험한 높은 곳에 장사진을 치고 희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있었다. 지휘본부로 보이는 제일 높은 곳에 적들이 분주하게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무슨 작전명령을 하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선창에는 12척의 적선이 줄지어 정박해 있고, 왜군들은 칼을 휘두르며 조선수군을 깔보는 듯했다.

이때 썰물이 되어 판옥선으로 적선 가까이 공격해 들어갈 수 없었으며, 활의 사거리도 높은 산 위에까지 도달할 수 없었다. 이순신은 적들이 매우 교만하여 만약 조선수군이 바다 가운데로 물러나는 척하면, 반드시 배를 발진시켜 추격해 나올 것으로 판단했다. 이순신의 판단이 맞았다. 조선수군이 1리 정도 후퇴하자 왜적 200여 명이 높은 곳에서 바닷가로 내려와 배를 지키며 조총을 쏘아댔다.

물때가 다시 밀물로 바뀌자 이순신은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일찍이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만들어 둔 거북선이 등장했다. 거북선은 배 앞에 용머리를 붙여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안에서는 바깥을 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만든 돌격선이다. 적선 수백 척 속에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는 거북선을 돌격장이 타고 나왔던 것이다. 

선두에 선 거북선이 천자, 지자, 현자, 황자 등 여러 총통을 쏘며 돌격해 들어가자 적도들도 산 위와 해안에서 조총을 빗발치듯 쏘며 응사해 왔다. 이때 판옥선이 재빨리 따라 들어가 총통과 불화살 등을 쏘며 적선을 분멸하기 시작했다. 해안에는 적의 사상자가 즐비했고, 부상자를 끌고 산으로 도주하는 적들은 감히 내려와 싸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선수군은 일거에 적선 12척을 불태워 없애고, 우리나라 소녀 한 명을 구출했다.
 

그런데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에 적탄을 맞아 관통상을 입었다. 군관 나대용도 총탄을 맞고 부상을 당했고, 예전에 봉사를 지낸 이설도 화살을 맞아 부상을 당했다. 나대용과 이설은 경상이었으나, 이순신 장군은 탄환이 어깨를 뚫고 등으로 빠져나올 정도의 중상이었다. 응급처치를 한 이순신은 그날 밤 사천선창을 빠져나와 모자랑포(사천시 용현면 주문리)에서 밤을 새웠다. 

그런데 이 와중에 원균은 개인의 전공을 챙기는 일에 급급했다. 6월 1일 새벽에 원균이 이순신을 찾아와, 전날 접전할 때 남겨둔 것 같은 적선 두 척이 도망갔는지 여부를 가서 알아보고 죽은 왜군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했다. 원균은 휘하에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작전을 지휘할 수 없었으므로, 교전하는 곳마다 왜군의 시신을 찾아 머리를 베는 일을 했다. 당시에는 전공의 기준이 적의 머리를 벤 수급의 숫자로 따졌기 때문에 원균은 전투보다는 수급에 집착했다. 이날 오전 8시경 다시 전날의 전투 현장을 다녀온 원균은 수급 3개를 갖고 돌아왔다. 이날 모자랑포를 빠져나온 이순신 함대는 창선도를 경유하여 사량도로 진출하여 다음 전투를 준비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천해전의 승리 요인이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라도 쪽으로 접근해 오는 적의 동태를 파악한 후 이억기의 전라우수영군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작전에 나선 것이 주효했다. 비장의 무기인 거북선을 이용하여 돌격전을 펼쳐 기선을 제압 것도 크게 한몫했다. 짐짓 후퇴하는 척 기만전술을 펼쳐 산 위의 적을 해안으로 끌어내려 격멸한 것도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전략이다.

무엇보다도 이순신 장군의 불굴의 투지가 최대의 승리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관통상을 입고 갑판에 피가 흥건할 정도였지만,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이순신 장군의 감투정신이 사천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전투 중에는 적의 목을 베어 전공을 인정받는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장졸들이 한마음으로 전투에 집중하여 승리할 수 있었다.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
https://yisoonsin.modoo.at

 

작성 2023.03.08 10:51 수정 2023.03.08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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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