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이순영

싸돌아다니는 사람은 불행하지 않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사람들의 엄살은 진짜 불행의 뒷모습을 보지 못한 미성숙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바람구두를 신은 프랑스 멋쟁이 랭보에게 반한 사람이라면 그의 불행까지도 사랑한다. 그의 불행은 이상하게 묘한 매력이 있다. 불행의 색깔이 칙칙한 검은색이 아니라 너무 희고 맑아서 햇살이 비치는 색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건 그의 영혼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지긋지긋한 고독의 옷을 껴입고 싸돌아다니다가 끝내 죽음으로 완성한 정신적 순수 때문인지 모른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젊은 시인의 똘끼가 주는 카타르시스 때문이라고 해도 나쁠 건 없다. 우린 죽었다 깨나도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위험한 이불 밖 세상을 감히 넘볼 수 없으니까. 용기 없는 비겁한 인생이니까.

 

자신의 지옥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랭보의 지옥으로 떨어져 그의 불행과 마주한 적이 있었을 것이다.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며 랭보처럼 웃었을 것이다. 랭보보다 덜 불행한 자신의 삶에 안도감을 느끼며 그의 이야기로 지성을 뽐내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밤새워 읽었던 그의 책 속 몇 문장을 외며 젊음을 낭비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시인은 가난해야 하고 시인은 불행해야 하고 시인의 시는 고통스러워야 한다며 그의 마음에 동조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불행하지 않고 여전히 행복하지도 않은 프랑스 신사였을 테고 지금도 바람구두를 신고 저 정신의 노마드를 즐기고 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똘끼로 똘똘 뭉친 예술가들이 등장해 정신적 즐거움을 주곤 한다. 살아보면 미치지 않고 사는 인생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저마다 다 자기 그릇만큼 미쳐서 살아간다. 누구는 돈에 미치고 누구는 사랑에 미치고 또 누구는 권력에 미치고 누구는 예술에 미쳐 살아간다. 미쳐도 곱게 미치면 재미없다. 랭보처럼 미쳐야 미친맛이 나는 법이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인간의 맛이 난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한 비릿하고 짭조름한 날것의 맛이 난다. 이 맛에 길들여지면 엠에스지 범벅인 다른 음식은 맛이 없어 쳐다보기도 싫어진다. 그게 랭보다. 그게 랭보의 시다. 

 

사랑천국 이별지옥을 랭보도 피해 가지 못했다. 하필 사랑이 동성이었고 하필 이별이 죽음이었을까. 금기는 깨라고 존재한다. 깨지 않으면 금기가 아니다. 지리멸렬한 세상의 질서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겠는가. 인간에게 해야 할 것이 따로 있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관념 따위가 더 위태로운 사유다. 그런데 재밌는 건 랭보는 꽃미남이다. 잘생긴 청년이다. 우리의 백석도 아주 잘생긴 시인이었다. 넘쳐나는 정신적 사유도 모자라 왜 잘생기기까지 한 것일까. 이 난해한 문제적 인간 랭보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요인은 아마 잘생김도 한몫했을 것이다. 

 

코로나가 만든 비대면 세상을 건너려고 사람들은 책장 깊이 쑤셔 넣어둔 랭보를 꺼내 들었을 것이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그의 사상과 씨름하면서 100여 년 전 잘생긴 꽃미남에게 마음을 빼앗겼을지 모른다. 삶은 지루하고 영혼은 메말라가는데 랭보라도 없었다면 질척거리는 사유의 강을 어찌 건넜겠는가. 랭보보다 불행하지 않은 삶을 위로받다가 랭보처럼 위대한 불행을 부러워하다가 쓸쓸하게 책장을 덮으며 빌어먹을 코로나에게 욕 한 바가지 퍼 부었을 것이다. 이 잘생기고 아름다운 청년 랭보의 지옥에서의 한철을 공감하지 못하면서도 공감하는 척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나는 마침내 나의 정신 속에서 인간적 희망을 온통 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사형집행인들을 불러들여 죽어 가면서 그들의 총의 개머리판을 물어뜯었다.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날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길게 쓰러졌다. 나는 범죄의 공기에 몸을 말렸다. 그러고는 광적으로 못된 곡예를 했다. 그리하여 봄은 나에게 백치의 끔찍한 웃음을 일으켰다.”

 

랭보의 시를 천천히 읽다 보면 그 속에 익숙한 내가 있다. 겁쟁이에 나약하고 실수투성이인 내가 보인다. 슬픔에서 도망치는 나, 음험하게 날뛰는 사나운 짐승 같은 나, 재앙에게 붙들리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내가 보인다. 베를린과 랭보, 두 미치광이의 미친 사랑도 이젠 별거 아닌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낯설다. 죽은 영감에 불을 지피려는 랭보도 결국 나약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버린 밤 여전히 랭보가 그립다. 그가 그리운 밤에 나도 지옥에서 한철을 보내고 싶어진다.

 

랭보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랭보가 단단한 속껍질을 가진 형이상학적 인간이라면 나는 겉껍질도 물렁물렁한 형이하학적 인간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치명적 결핍을 가진 그와 그저 평범한 결핍을 가지 나는 그래서 다르면서 같다. 그는 참을 수 없는 건 참지 못할 일이 없다는 걸 아는 것이고 나는 참을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아는 것이다. 빌어먹을 난 그래서 안된다. 그의 지옥이 나의 지옥에게 말을 건넨다. 그의 나이 37세, 마침표도 눈부시다. 

 

“나는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3.09 11:15 수정 2023.03.0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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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