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명선이복초 : 여성에게 바치는 헌사

이태상

2020년 4월 9일자 뉴욕타임스는 ‘인공지능의 미래(The Future of A.I.–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제하의 특집을 냈다.

 

인공지능은 무소부재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테크놀로지 기술이 계속 개발되고 확장될수록 우리 삶에 그 더욱 큰 충격을 주게 된다는 이야기다. (A.I. is everywhere and affect everything we do. As technology continues to evolve and expand, so does its impact on our lives.)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thinking machines)’를 갖고 과학적으로 새로운 발견이 가능할 것인가. 가능하다면 새로운 발견이 무엇을 초래할 것인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인가.

 

그 예를 들자면 기계가 음식 맛을 보고 요리사를 훈련시켜 음식물의 낭비를 줄이고 신선도를 높일 수 있게 될 것인가. 또는 현재 우리가 엄마나 아이에게 아니면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 전화해 집안일을 챙기듯 로봇과 교신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인공지능을 통해 대양의 숨은 비밀을 알아내고 그 자료를 분석해 멸종 위기에 처한 고래를 보존하고 대양의 오염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또는 운동선수와 팀에게는 물론 스포츠 도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되겠는가 등이다. 이미 수십 년 동안 영화산업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복잡미묘한 관계 ‘본드(bond)’를 자세히 검토해오지 않았는가.

 

또 다른 예로 미국 몬태나주(州) 롤로(Lolo)에 있는 ‘붉은 색연필 필사본/이본/번역본/주석(Red Pencil Transcripts)’ 창업주 엘리 레오나드(Ellie Leonard)는 언어의 뜻을 해독함에 있어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Ellie Leonard’s experience points to the ongoing limitations in using computers to capture the meaning of language.)

 

그런가 하면 과학자들은 기계로 하여금 ‘상식(常識)’을 개발케 할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고 있단다. (Scientists are exploring ways to help machines develop ‘common sense.) 이는 인공지능의 미래는 스스로 자습자득 할 수 있는 시스템 개발에 달렸다는 결론이다. (A.I.’s future depends on systems that learn on their own.)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이라 하면 인간의 지능을 갖고 있는 기능을 갖춘 컴퓨터 시스템으로 인간의 지능을 기계 등에 인공적으로 시연(구현)한 것을 뜻한다. 아울러 그와 같은 지능을 만들 수 있는 방법론이나 실현 가능성 등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를 가리키기도 한다.

 

인공지능의 미래는 그렇다고 치자. 그보다 더 절실히 절박하게 필요한 건 자연지능(自然知能)을 시급히 회복하는 게 아닐까. 몇 년 전 미국에선 출판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쳐 크게 물의가 일었다. 1990년 출간된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수 많은 독자들의 애독서가 되어 온 미국 작가 하퍼 리(Harper Lee, 1926-2016)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의 정의로운 변호사로 자녀들의 롤모델이었던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가 55년 만의 신작 ‘파수꾼(Go Set a Watchman)’에서는 인종주의자로 묘사되어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치듯 쏟아졌었다.

 

뉴욕타임스는 ‘앵무새 죽이기’보다 2년 전에 쓰여진 습작 같은 ‘파수꾼’에서 ‘앵무새 죽이기’ 같은 고전적인 걸작을 이끌어낸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음을 심층 취재해 보도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이 숨은 역할을 한 사람은 ‘앵무새 죽이기’ 편집자 터리즈 폰 호호프 토리(Therese von Hohoff Torrey, 1899-1974)로 직업상으로는 테이 호호프(Tay Hohoff)로 불렸다.

 

짐작건대 저자 하퍼 리가 20대 젊은 날에 쓴 원고 ‘파수꾼’을 읽고 편집자 테이 호호프가 그 어둡고 부정적인 내용을 독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밝고 긍정적인 것으로 고쳐 쓰도록 적극 독려했으리라. ‘파수꾼’에서 백인우월주의자의 테러 단체 KKK에 가담하고 인종차별제도 폐지를 극렬하게 반대하면서 “깜둥이가 차떼기로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극장에 몰려오면 좋겠느냐?”고 딸 진 루이스 핀치(Jean Louise Finch), 별명은 ‘스카우트(Scout)’에게 소리 지르는 인종주의 골수분자 애티커스가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누명을 쓴 흑인 남성을 감동적으로 변호하는 아주 훌륭한 인물로 그리도록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가 다 ‘보이지 않는 손’ 아니 ‘보이지 않는 공정한 머리’와 ‘보이지 않는 따뜻한 가슴’이 필요하지 않은가.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각자는 다 이중인격자라 할 수 있으리라. 애티커스의 빛과 그림자 양면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단지 ‘앵무새’를 죽이고 살리느냐가 우리 개개인 각자에 달렸다. 개인적으로뿐만 아니라 어느 국가, 여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세계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미국만 보더라도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트럼프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데는 흑인 대통령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보수 백인 사회의 뿌리 깊은 반감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음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 일어나지 않았었나. 오바마가 흑인 대통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선까지 되었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흑백격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가 공공연히 실시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1918-2013) 대통령이 등장하지 않았었나. 그리고 전태일(1948-1970)이 분신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한국에서도 비록 결국 투신자살로 끝나고 말았지만 가방끈도 짧은 인권변호사 노무현(1946-2009)이 서민대통령이 되지 않았었나.

 

언제 어디서나 밝은 면이 있는가 하면 어두운 면도 있게 마련이다. 비교적 객관적인 것 같은 다큐멘터리도 어느 면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나지 않든가. 그러니 사람은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고 찾는 것만 눈에 띄게 되는 것이리라. 어느 쪽을 죽이느냐에 따라 그 반대쪽이 살아난다면 세상의 명암(明暗)도 각자의 명암도 결정되는 것이리라. 실로 빛을 위해 어둠도 존재하는 것이리.

 

그렇다면 인위적인 인공지능이든 그 어떤 아무런 고정관념도 선입견도 편견도 없던 자연적인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 곧 명선이복초(明善以復初)가 우리 삶 속에 선(善)을 밝히는 길이리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의 길’임에 틀림없어라.

 

2015년 개봉된 디즈니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t)’에 나오는 장면이다.

 

‘생각열차(The Train of Thoughts)’를 타고 가다 영화 속 인물 조이(Joy)가 두 개의 상자를 넘어뜨린다. 하나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의견’이란 딱지 꼬리표가 붙어 있는 상자들이다. 이 두 상자에서 쏟아진 것들이 마구 섞이는데 이를 원상복구 하기는 난감한 일이다. 쏟아진 ‘사실들’과 ‘의견들’이 서로 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늘 경험하는 일 아닌가. 특히 선입견이나 편견 또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일수록 이 두 가지를 혼동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사실을 인지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의견이 개입되는 현상이리라. 비근한 예로 누가 어떤 질문을 해 올 때 때때로 우리는 동문서답하게 되지 않든가. 어떤 사고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그 현장에 있던 목격자들이 후에 증인으로 소환되어 증언하는 것을 들어보면 제각각이다.

 

그러니 사람은 그 어느 누구도 절대적으로 객관적일 수 없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고운 사람 미운 데 없고 미운 사람 고운 데 없다는 의미로 애인무가증(愛人無可憎)이요, 증인무가애(憎人無可愛)라 하지 않나. 그뿐더러 똑같은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희망을 품을 수도 있고 그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절망에 빠져 삶을 포기하기도 하지 않든가.

 

2015년 7월 20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문학산책 칼럼 ‘영원한 청춘, 베르테르’에서 김은자 시인은 묻는다.

 

“괴테는 시대의 가치를 뒤엎고 빗나간 사랑과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소재를 선택했네. 사랑은 소유가 아닌 이해와 소통이라는 걸 말하기 위하여. 청춘이여, 사랑을 열병이라 할 수 있다면, 뜨겁게 앓다가 일어나 한 여자를 오래 사랑하고 깊이 절망하고 목말라 한적이 있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대는 승리한 사람이네. 슬픔과 고뇌는 사랑의 특권이네. 뜨겁게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반란 없이 이 험한 세상을 어찌 건너려 하는가.”

 

서간체소설 ‘자줏빛(The Color Purple, 1982)’으로 미국의 내셔널 북 어워드(The National Book Award)와 퓰리처상(The Pulitzer Prize)을 수상한 미국의 인기 흑인(African American) 작가 알리스 워커(Alice Walker 1944 - )의1992년 출간된 ‘남모르는 기쁨을 갖기(Possessing the Secret of Joy)’ 서두 책 첫머리에 ‘허물없는 00에게(To the Innocent Vulva)’란 저자의 헌사가 있다.

 

이 소설은 여자혐오증 특히 어린 소녀의 외음부 성기를 잘라내는 관습을 다룬 작품으로 저자는 그 에필로그에서 오늘날도 아프리카와 아시아 및 중동지역에 사는 1억 이상의 여성들이 이와 같은 만행의 제물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어디 미개사회에서뿐이랴. 미국에서 일 년에 자궁절제수술을 받는 여성이 6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 반 이상이 불필요한 수술을 받는 것이라고 미국의 한 산부인과 전문의는 주장한다.

 

‘여성과 의사들(Women and Doctors, 1992)’의 저자 존 엠 스미스(.John M. Smith) 박사는 이러한 불필요하고 정당화될 수 없는 수술행위로 지불되는 의사료만 일 년에 10억 달러 이상이라며 의사들이 과다한 보수를 챙기는 반면 불충분한 감독 제재를 받고 있다는 현실에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제왕절개수술 대신 그 대안으로 다른 치료법을 개발하고 사용하는데 의사들이 무관심하고 무성의하다”면서 그는 의사들이 여성환자들을 비인간적으로 잘못 다루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단다.

 

한번은 그의 한 동료 의사가 자기가 진찰한 한 여성의 몸을 ‘상담 고문의사’로 가장하고 구경하라고 하더란다. ‘여자가 기막히게 섹시한 몸과 음부(陰部)를 가졌다면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남성 공통의 약점을 간파해서인지 (실토하자면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소년들이 사춘기 때 장차 커서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 마음대로 여자의 ‘음부’를 실컷 봤으면 했던 기억이 있지 않나) “남자가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선 안 된다”고 스미스 박사는 선언하듯 말한다.

 

여자의 몸을 진찰하는 역할은 응당 당연히 여자에게 속한 것이다. 여성만이 여성을 이해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데 현재 산부인과 전문의의 80%가 남성이란다. 그뿐더러 많은 남성들이 부인과를 전문분야로 선택하는 것이 여성을 통제하고 지배할 수 있는 우월한 입장과 유리한 지위를 확보하려는 그들의 잠재의식적인 필요성에서란다.

 

부인과 전문의는 무엇보다도 예방과 응급, 조기 진료에 치중해야 한다면서 여성의 신체적인 구조와 배란, 임신, 월경 등 생리적인 작용과 현상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그 이상으로 여성의 성욕, 성적 상호작용, 문화적인 가치관, 불안감과 공포심 등 여성 특유의 심리적 구조와 생리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는 까닭에 남자는 부적격하고 여자가 적임자라고 스미스 박사는 설명한다.

 

여러 말 할 것 없이 우리말에 예부터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했다. 그러니 여성은 어디까지나 남성의 흠모 흠앙의 대상일 뿐, 그 신비경과 신성불가침성을 침범하거나 모욕 모독해서는 절대로 아니 됨을 세상의 모든 남성들이여, 명심할지어다. 옛날 그리스의 시인 미네르무스(Mimnermus about 630-600 BC)가 탄성을 지르며 탄식했듯이 말이어라.

 

“사랑과 아름다움이

없는 곳에

무슨 삶이 있으며

무슨 기쁨이 있으랴!”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없는 곳에)

 

What life,

What joy

Is there

Without

Aphrodite!”

 

어디 이것이 사람에 대해서만이랴. 자연과 신(神)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으랴. 시인 조승래의 시 ‘되돌아오다’를 우리 모두의 메아리로 음미해보리라.

 

바다를

강이 끌어당기고

강을

시냇물이 끌고 가고

시냇물을

빗줄기가 데려가고

빗줄기를

녹차가 우려내고

우려낸 향기를

한 사내가

받아 마신다.

찰랑이는

찻잔 속

바다

 

이 시를 장석주 시인은 또 이렇게 읽어낸다.

 

“찻잔 안에 물이 찰랑인다. 이 물은 어디에서 왔는가? 물의 기원은 빗줄기에서 시냇물로, 시냇물에서 강물로, 강물에서 바다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은 돌고 도는 긴 순환 끝에 찻잔으로 돌아온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순환하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물은 순환하며 세계를 비옥하고 풍요롭게 만든다. 세계가 순환할 때 우리는 날마다 변한다. 이것은 우리가 순환하는 자연과 우주의 일부라는 뜻이다.”

 

아, 아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하나같이 비록 한 방울의 핏방울이든 땀방울이든 눈물방울이든 흘러 흘러 우리의 영원한 고향 코스모스바다로 돌아가는 것이리. 아롱아롱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코스모스하늘로 피어오르는 것이리.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합동통신사 해외부 기자

미국출판사 Prentice-Hall 한국/영국 대표

오랫동안 철학에 몰두하면서

신인류 ‘코스미안’사상 창시

이메일 :1230ts@gmail.com

 

작성 2023.03.11 10:38 수정 2023.03.1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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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