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령통사
그날, 나는 ‘영화로 망하고 식당으로 대박 났다.’는 이미례 감독이 운영하는 인사동 ‘여자만’에서 소주잔을 기우리고 있었다. 술은 거나하게 취했고 앞에 앉은 작가는 꼬부라지는 혀로 인간에게는 지적영혼이라는 단 하나의 유일한 형상만이 있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를 들먹이며 내게 술주정을 했다. 그의 술주정은 당나라 이백처럼 귀엽고 천진했다. 지적영혼은 토마스 아퀴나스나 가지라고 맞장구를 치며 술 한 병을 또 시켰다. ‘여자만’의 술꾼들도 하나 둘씩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우리는 결론도 없는 담론을 안주삼아 낄낄거리며 죽도록 술을 마셔댔다. 앞에 앉은 작가는 몇 년째 쓰지 않아 녹슨 모국어를 꺼내 보이며 글이란 놈에게 시비를 걸다가 조롱을 하다가 한숨을 쉬다가 벽에 붙어 웃고 있는 소주광고 속 이효리에게 윙크를 하다가 문 닫을 시간이라며 재촉하는 주인에게 내쫓기고 말았다.
그날, 나는 인사동 거리를 걸으며 문학에 길이 있다고 까불던 시절의 철없음을 후회했다. 문학엔 길이 없다. 문학엔 문학만 있을 뿐이다. 길은 밥 위에 있고 길은 텅 빈 지갑 속에 있다. 길은 세상에 있고 길은 사람에게 있다. 나는 소풍 끝내고 하늘로 돌아간 천상병 시인이 살았던 ‘귀천’의 찻집 골목 옆을 지나다가 문득 그가 소풍 왔던 세상의 쓸쓸함에 대해 생각했다. 쓸쓸함은 쓸쓸함을 불러온다. 쓸쓸함은 야만의 힘을 가지고 있다. 신과 마주앉아 대면하는 키르케고르와의 단독자처럼 쓸쓸함은 인간의 본질이다. 나는 이 개똥같은 쓸쓸함에 함몰되다가 겨우 인사동을 빠져 나와 종로3가 낙원상가 앞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또 기우렸다. 그러다가 새벽이 오고 나는 세포 속을 돌아다니는 술기운을 털어내며 버릇처럼 길을 떠났다. 떠나는 길은 언제나 거기 그렇게 있었다.
-기다려라 개똥이여 내 기어이 쓸쓸함과 대적하고 말리라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다. 산마다 들마다 초록의 생명들은 소나기를 맞으며 춤을 췄고 산과 산 사이로 무지개가 다리를 놓고 있었다. 나는 무지개다리를 건너 소백산을 올라 죽령을 달렸다. 죽령을 넘어 한참을 달리자 두음법칙을 무시하고 ‘영’을 ‘령’으로 쓴 ‘령통사’가 나타났다. 마음을 기우려 자세히 보지 않았더라면 못보고 지나칠 뻔 했다. 령통사로 들어가는 길은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여기에 길이 있으랴 싶을 만큼 협소했다. 굽이굽이 돌아 한참을 가고 나서야 두어 채 시골집이 나왔다.
거기서 또 험한 길을 오르고 나니 돌탑을 쌓아 논 령통사 입구가 보였다. 여느 절처럼 간결한 아름다움이 자연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긴 계곡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있고 그 위로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 위로 지장전과 비로전이 있고 왼쪽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맨 위에 삼성각이 있었다.
나는 삼성각 마당에 서서 먼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저 산 너머 인간의 마을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나를 휘감고 돌아 산 너머로 사라져갔다. 멀리 사라졌다가 어디선가 다시 나타나 온산을 훑고 지나갔다. 땡볕에 졸고 있는 사마귀의 곁으로 나비가 날아와 잠시 앉았다가 범종각 쪽으로 사라져갔다. 나는 갑자기 한단지몽이 생각나 웃고 말았는데 산사의 바람결에도, 졸고 있는 사마귀에게도, 날아간 나비에게도 쓸쓸함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의 이름을 나는 ‘쓸쓸함’이라고 혼자 되뇌며 산신각에 서서 바람이 몰려간 소백연봉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 쓸쓸함을 안고 대웅전에 들러 삼배를 마치고 나왔다. 길게 기른 수염에 쓸쓸함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노스님이 차 한 잔을 권하며 바람이 전하는 말 같은 법문을 들려 주셨다. 이 산 저 산을 떠돌며 수행에 정진하셨다는 스님의 눈동자에 성긴 별들이 몰려 왔다가 몰려가곤 했는데 나직나직한 스님의 법문이 내 쓸쓸함 속으로 들어와 무심의 집 한 채를 짓고 있었다. 찻잔은 여러 번 비워지고 여러 번 채워졌는데 스님과 나 사이의 쓸쓸함은 찻잔 속 찻물처럼 아리고 단백하게 우려지고 있었다. 진하게 울어난 찻물 속에 쓸쓸함을 마시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날 마셔댔던 순도 높은 알코올의 감성적 진실처럼 쓸쓸함도 내 오장육부를 돌아다니면서 독버섯처럼 자라난 독선을 치유해 주는 스승일지 모른다고 령통사를 내려오며 생각했다. 그런 나를 담 밑에 핀 봉선화가 수줍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고 계단까지 내려와 배웅해 주던 스님의 합장 속엔 부처를 닮은 쓸쓸함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