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청산리 벽계수야

이순영

여자의 세상은 고달프고 힘들다. 천 년 전에도 오백 년 전에도 그리고 일 년 전에도 여자의 삶은 행복보다 고통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똑똑하고 재능있고 미모까지 두루 갖춘 여자라고 해도 관습의 벽에 부딪히고 도덕적 제도의 노예가 되어야 하고 관계의 불합리한 피해자가 되어야 한다. 주체적인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본 적이 없는 학습된 무기력증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여자는 그래도 되는 혹은 그래야 하는 집단무의식이 잠식한 사회적 인식의 피해자로 살아오다 보니 ‘그러려니’라는 의식이 무의식에 잠재해 있었다. 그저 자식농사 잘 짓는 인간농사꾼으로서의 만족도만 최고치를 달성하고 살았다. 

 

16세기 여자의 존엄이란 눈 씻고 봐도 없던 시대의 여성은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자기 결정권을 가질 수 없고 남성 사회의 틀 안에서 무조건 순응해야 하는 여자의 삶은 어떠했을지 가늠할 수 없다. 남성이라는 절대 권력과 사회구조 안에서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야 했을까.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온갖 박해와 차별을 그대로 수용하며 살았을 여성들을 다시 만나는 건 쉽지 않다. 21세기 개명한 세상의 여성이 16세기 통제된 세상의 여성을 만나는 건 단단히 마음먹어야 하는 일이다. 모두 어둠뿐인 곳에서 홀로 깨어 있었던 한 여성의 삶을 감히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았던 한 여성 ‘황진이’는 우리에게 여전히 사유의 숲을 제공하고 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천민은 짐승이었던 이 지독한 16세기를 살아냈던 여성 ‘황진이’는 사회의 부조리를 일찍 알아버렸다. 하늘이었던 아버지가 땅 중에서도 저 변두리 천박한 땅인 어머니를 만났다. 사랑이라는 포장지로 예쁘게 싼 만남이었지만 이미 부인이 있는 남자의 여자가 되는 건 자식에게 ‘서자’라는 타이틀을 주는 것뿐이다. 이 지독한 유교주의 틀 안에서 첩의 자식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황진이는 그렇게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출신의 비밀을 모르고 자랐다. 그러다가 약혼할 무렵에야 자신의 서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서녀라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사회적 관습과 제도의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똑똑하고 아름답고 지적인 황진이는 스스로 가장 천한 ‘기생’을 선택한다. 사회에 맞서고 관습에 맞서 남성이라는 권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 주리라고 결심이었을 것이다.

 

조선을 중종이 다스리던 시절, 전국에 삼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삼만 명이 모두 관기였으니 기생은 국가공무원이라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16세기 기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생이 아니다. 시와 그림과 악기와 미모까지 두루 갖춘 예술인이 기생이 될 수 있었다. 문사철을 고루 갖춘 인문학적 소양의 여성들이다. 함부로 깔보고 멸시할 대상이 아니라 남자들의 정서적 예술적 파트너인 공무원이었다. 개성을 유명하게 만든 ‘송도삼절’의 주인공이 바로 황진이다. 송도 성거산에 칩거하며 도를 닦던 화담 서경덕과 그 서경덕을 흠모하여 유혹하려다가 실패하고 제자가 된 황진이와 아름답기가 기가 막힌 박연폭포를 우리는 ‘송도삼절’이라고 부른다. 

 

수많은 일화와 전설의 주인공이 된 황진이를 한마디로 해석하긴 매우 어렵다. 깊은 사색으로 학문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확립한 철학자 서경덕과의 로맨스는 결국 진정한 사제로 승화된 것이나, 산속에서 면벽참선하던 지족선사를 유혹해 십년공부를 ‘도로아미타불’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이나, 콧대 높은 로열패밀리인 벽계수를 나귀에서 떨어지게 한 것이나, 황진이와 동거했던 재상 송순과 소세양, 이사종과의 6년간의 계약결혼, 고시에 붙어 임지로 떠나면서 평소 사모했던 죽은 황진이 무덤에 절을 해 파직당한 임제, 황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허균, 이덕형, 유몽인 등을 보면 한 시대를 쥐락펴락한 황진이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그녀의 기행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황진이식 항거이며 관습과 운명에 대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

 

황진이의 대표작인 이 시조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조다. 벽계수를 유혹하려는 마음과 맑은 청산에 흐르는 맑은 벽계수의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도도한 로열패밀리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비유한 것은 그녀만의 문학이 가지고 있는 힘이다. 벽계수는 자신은 로열패밀리로서 굳은 위상과 자존심 있어 절대로 황진이에게 넘어가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황진이를 쫓아버릴 수 있다고 만용을 부리지만 똑똑하고 지적인 황진이는 그깟 벽계수쯤이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황진이는 사람을 시켜 벽계수를 송도로 유인해 오게 하고 나귀를 탄 황진이가 고삐를 잡은 채 노래를 부른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가을 달밤에 아름다운 황진이의 청아한 노래를 들은 벽계수는 그 노래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나귀에서 떨어지고 만다. 그 모습을 본 황진이가 벽계수를 조롱한다.

 

“나를 쫓아버린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나요”

 

자신의 언행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벽계수와 가을 달밤을 유유히 흐르는 벽계수의 묘한 그림은 보지 않았어도 본 듯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진다. 완벽한 황진이의 승리였다.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어디 자랑할 게 없어 출신성분을 자랑질하며 한 여인의 자존심을 건드린단 말인가. 좀팽이 중의 좀팽이다. 남성이라는 권력을 휘두르며 여성이라는 약자를 하찮게 보았던 16세기 남성들에게 멋진 엿을 먹인 황진이의 삶은 슬프면서도 찬란하고 아름다우면서도 고매하다. 

 

타오르는 불처럼 뜨겁게 살다 간 황진이는 서른여덟 해를 살고 세상을 뜬다. 그는 자신이 죽고 나면 시체를 저잣거리에 버려두라는 유언을 남긴다. 뜨거웠던 영혼을 가진 그녀는 육신마저 모든 사람에게 보시하고 싶었던 것일까. 육신의 덧없음을 알리고 싶었던 것일까. 황진이를 ‘말을 이해하는 꽃’으로만 치부하는 건 모독이다. 황진이는 주체적인 인간이었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극한까지 경험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노래를 아낌없이 부른 예술인이었기에 오늘날까지도 그의 삶과 문학을 숭앙한다. 

 

그녀, 참 멋지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3.23 11:39 수정 2023.03.23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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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