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창회에 다녀왔다. 늙은 나이가 되었으니 이제 편하게 살아가자는 이야기뿐이다. 재담 좋은 친구들이 “버려라!”,“비워라!”하며 홀가분한 살림살이를 조언한다. 집 평수도 줄이고, 불필요한 물건도 정리하고, 세상사에 너무 얽매이지 말란다.
버릴 만큼 넉넉한 생활은 아니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호나 취미에 대한 애착, 당장 필요는 없지만 나중과 만일을 생각한 비축, 효율과 편리만을 따져 사들인 갖가지 생활 도구들이 허다하다.
‘미니멀 라이프’는 필요한 것 이외에는 가지지 않는 생활방식이다. 적게 가짐으로써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삶의 중요한 부분에 집중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물건을 적게 가지는 것뿐 아니라 ‘단순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천성이 ‘미니멀리즘’이고 ‘미니멀리스트’였던 것 같다. 모은 게 없어서 버릴 것도 없고, 욕심낸 게 없어 비울 것도 없는 삶이었다. 그냥 모자라지 않을 정도의 양(量)으로 족하고, 그냥 사용하기에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질(質)이면 만족했다. 빛나는 명품이나 편리한 신상품보다는 오래도록 정이든 물건이나 사연이 담긴 애장품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남보다 한발 앞서는 유행보다는 나에게 어울리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택했다. 힘과 노력은 들어도 의미와 이념에 더 집중하느라 실속 없는 일도 많았다. ‘분복(分福)에 안분지족하면 석복(惜福)하리라.’믿었다.
의식이나 정서도 그랬다. 의기충천한 젊은 날도 있었지만 결코 크고 화려한 인생을 욕심내지 않았고, 함부로 성공이나 출세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영웅적인 행동은커녕 설사 허세라 하더라도 호언장담의 기개도 부려보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조바심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 규칙과 규정에 순응하는 방법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소확행(小確幸), 소소한 것에 만족하고 사느라 소박한 인생이었지만 후회해본 적도 없었다.
누구나 얼굴이나 성격이 다르듯 사람마다 세상 살아가는 방향과 방법도 다르다. 남과 다르다는 의미는 특이한 것이 아니라 특별하다는 것이고 나만이 가진 행복의 감정이다. 삶에 우열과 정오가 없듯이 봄날의 따뜻한 햇볕은 누구네 삶의 공간에도 똑같이 비춰줄 뿐이다. 분명한 내 삶의 기준을 갖고 있기에 서울대 최인철 교수의 말처럼 ‘행복의 다른 말, 흡족(洽足)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한다.
미니멀 라이프는 어쩌면 자연을 닮은 것 같다. 세상에 어떤 새도 자기 둥지를 크고 호화롭게 꾸미지는 않는다. 비바람 막고 새끼들 키울 수 있는 단칸방이면 족하다. 절대 포식자인 평원의 사자도 먹을 만큼만 사냥할 뿐이지 내일을 위해 저장하지 않는다. 사람이 아닌 이상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배부르게 먹는 동물은 없다. 세상의 어떤 싹도 자기 시간이 되면 기지개를 켜고 움트는 것을 알묘조장(揠苗助長), 성급하고 욕심 많은 인간만이 기다릴 줄을 모른다.
코로나바이러스를 겪었다. ‘몸은 멀리, 마음은 가까이’하라며 비대면,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화되었다. 너무 많이 만나고, 너무 많이 사용하고, 너무 많이 버려서 발생한 자연재해라고 한다. 확대재생산의 성장 논리에 의해 비우지 못하고 채우기에 급급해 일어난 일이다. 앞으로 인류 전체가 미니멀 라이프로 살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자연의 경고인지 모른다.
은퇴의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가 좋아서 하는 일, 나의 삶에 집중하려고 한다. 삶의 속도를 느리게, 천천히, 쉽고 간편하게 살기로 했다. 동시다발적으로 해야 안심이 되든 멀티형 사고도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에포케(Epoché)’는 어떨까. 가능하면 세상일에 대응하지 않고 때로는 무관심하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도 달고 단 무화과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조금 헐렁해지고, 조금 낮아지고, 조금 따뜻해지기로 했다. 무엇보다 남과 비교하지 않는 삶, 겉치레에 신경 쓰지 않는 삶, 욕심부리지 않는 지족자부(知足者富)의 삶을 살려고 한다.
미니멀 라이프가 단순히 근검절약하는 생활과 축소 지향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더구나 꿈도 야망도 없는 무계획적인 삶이나 재미나 즐거움도 없는 단조롭고 건조한 생활이 되어서도 안 되겠다. 목표와 기대치가 없이 살아서 지난날에 대한 원망이나 아쉬움이 덜하다는 결론이라면 그건 인생의 방기일지도 모른다.
정작 버려야 할 것은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미움, 질투, 원망이 아닐까 한다. 살아있는 한 어느 구석에 허영과 탐욕의 씨앗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니멀 라이프는 세상과 한 발짝 물러나 본 시간이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살아왔던 지난날을 돌아보는 시간이고 서로 주고받은 상처를 용서하고 위로하는 시간이다.
소유가 인생의 목적일 수는 없다. 재산이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공덕을 쌓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공간이다. 물질이 아니라 머릿속의 의식이나 가슴 속의 관용으로 삶의 부피를 키워야겠다. 작고 적은 것에 만족하며, 채우기보다는 비우며 살다 보면 행복의 길이 열리리라 믿는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