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이 발랄한 바람과 꽃을 모시고 오셨다. 남녘 섬마을 산기슭마다 동백꽃이 붉다. 개나리도 샛노랗다. 벚꽃은 희다. 마른 땅 위에는 부슬비가 내린다. 땅속으로 물기가 스며들고, 그 속에서 뿌리들이 실룩거리면서 춤을 추는 듯하다. 이처럼 계절은 어김없이 환하게 밝아오는데, 이 춘절(春節)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발길은 어둡고 무겁다.
희망보다는 몽매한 좌우의 추(錘)를 매달고 있는 듯, 빈 깃발을 내흔드는 권충(權蟲, 권력에 눈이 먼 벌레)들의 작태가 그러하다. 내로남불, 아전인수, 견강부회...
이런 시절에 떠오르는 노래가 부산 출신 이정화가 절창한 <봄비>다. 1967년 신중현이 작사 작곡한 봄날의 역설적 서정, 2022년 JTBC 싱어게인2에서 20호 가수 신용남이 샤우팅한 서글픈 봄노래.
올해의 봄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다. 정충들의 헛발질 같은 허언(虛言)들 때문이다. ‘몇 백억, 몇 천억’에 뒤얽힌 잡배들의 아귀다툼은 보기도 듣기도 민망한 꼬락서니들이다. 그래서 마음은 더욱 허허하다. 이 허전한 마음 달랠 길 없는, 몽매한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나린다. 나를, 세상을 울려주는 비~.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마음을 달래도 /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 한없이 흐르네 /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 언제까지나 나리려나 /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 / 외로운 가슴을 달랠 길 없네 /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 한없이 흐르네.
노래 속 화자는 비를 맞으며 외로이 걷고 있다.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길은 없는가. 예나 오늘날이나 봄과 비는 금슬(琴瑟)이 좋았는데, 이 노래는 축축하다. 오늘의 정치 사회적 환경처럼 추절거리고 퀴퀴하다. 그래도 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의 위로가 된다. 이열치열(以熱治熱)처럼 이독치독(以獨治獨)의 에너지가 충전된다.
그러니 감성 보이스 이정화의 <봄비>를 감흥하시면서 스스로 구겨진 마음을 다림질하고, 가슴팍에 켜켜이 쌓여 가는 먼지를 털어내시라. 그리고 새로운 마음을 도사리시라. 혹자는 이은미의 허스키 목청으로, 박인수의 젖은 감성으로 음유하고, 김추자의 떨림 목청 늪에 빠지고, 글래머 율동을 따라서 엉덩이를 흔들어도 좋으리라.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온 1960년대 후반은 산업화의 엔진 구동 소리가 우렁차던 시절이다. 이농향도(移農向都)의 긴 열차 객량을 중앙정부 차원의 기관차가 덜컹덜컹 이끌던 시절이다. 그렇게 60여 년의 세월에 무르익은 나라가 오늘이다. 그 시절의 봄도 녹록하지는 않았다. 누구나의 가슴팍은 시리고 외롭기까지 했었다. 그래서 신중현은 그 시절의 봄을 눅눅하고 무겁게 얽은 것이었으리라. 대중예술가는 세상을 역설한다. 신중현은 당나라 시인 이상은(813~858)의 시 <춘우>(春雨)를 얼마나 묵시했을까.
‘새봄 하얀 겹옷을 입고 슬퍼 누웠다가/ 쓸쓸히 백문에 나가보니 마음이 달라지네/ 빗속에 차갑게 건너다보는 가인의 집/ 주렴 안에 흔들리는 등불을 보며 돌아왔네/ 먼 길 슬픔에 겨워 봄밤은 깊어가는데/ 새벽녘 꿈에서 겨우 보는 희미한 모습이여/ 옥 귀고리 넣은 서찰을 어떻게 보낼까/ 만 리 비단 구름에 외기러기 날아간다.’
<봄비>를 작사 작곡한 신중현은 1938년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여 서라벌예술고(버크리 음대 명예박사)를 졸업하였다. 아버지는 이발사 어머니는 미용사 집안으로 그 시절로 치면 배고프지 않은 유년기를 보냈다. 1938년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나라 민족문화말살정책을 펼치던 시기다.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이 그 실증적 증거다. 1938년에는 조선인육군징집령을 발령했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기간이었으며, 1941년 미국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 직전으로써, 조선인 징집과 징용 수탈이 만행되던 시기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신중현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을 피해 만주로 떠났다. 그 시절 ‘만주로 개장수 하러간다’는 말의 주인공이다. 신중현이 다섯 살 때다. 그는 아버지를 따라 만주벌판을 떠돌았고, 여덟 살 되던 해에 해방광복(1945)을 맞이하여 귀국하였다. 이런 중에 1950년 6.25 전쟁이 또 발발한다. 이때 충북 진천군 백곡면으로 피난을 가 있었는데, 그 와중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신중현이 초등 5학년 13세 때다. 그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먼 친척집 공장에서 일하며 독학으로 기타를 배웠으며, 열여덟 살에 친척집을 나온다.
그해 1955년 미8군 무대에서 기타리스트 ‘히키-신’으로 데뷔했다. 그 시절 미8군사령부가 일본 동경에서 서울 용산으로 옮겨왔다. 1955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965년 베트남 전쟁터로 전환될 때까지 30여만 명이 우리나라 250여 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을 상대로 공연을 펼친 무대가 미8군 무대다. 한국대중가요100년, 현대사의 서막에 펼쳐진 음악 특화시장이었다. 신중현은 1964년 자신의 첫 앨범이자 한국 록음악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밴드 애드포(Add4) 앨범을 발표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신중현은 1968년 자매 듀오 펄시스터즈의 데뷔 음반을 제작하면서 프로듀서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이때 발표한 <님아>, <커피 한 잔>, <떠나야 할 그 사람>은 한국에서 히트한 거의 최초의 로큰롤과 R&B(리듬 앤드 블루스) 곡이 되었다. 신중현은 뒤이어 김추자·박인수·장현 등을 발굴하면서 스타 제조기로서 명성을 쌓았다. 1967~73년 발표했던, <봄비>, <님은 먼 곳에>, <거짓말이야>, <미련>, <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같은 노래들은 큰 성공을 했다.
그는 1972년 밴드 더맨(The men)을 결성했다. 기타 신중현, 보컬 박광수, 오브에 손학래, 키보드 김기표, 베이스 이태현, 드럼 문영배다. 이들이 한국 록 음악사상 불후의 명곡으로 칭송받는 <아름다운 강산>을 발표했고, 이후 3인조 밴드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큰 성공을 거둔다. 베이스 이남이, 드럼 권용남, 기타 보컬 신중현)이었다. 1974년 발표한 앨범에는 <미인>, <떠오르는 태양> 등 총 10곡이 담겨 있는데, 이 음반은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음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1975년 대마초사건(해피스모그 사건)으로 인해 5년 동안 활동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도 했다.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는 근대적 시설을 갖춘 우리나라 최초의 감옥으로, 사적 제324호다.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251(현저동 101). 1987년 당시 수감 가능 인원은 3,200명. 1907년 시텐노가즈마 설계로 착공, 1908년부터 1988년까지 80년 동안 약 35만 명을 수감한 민족수난사의 감옥시설이다. 이 구치소의 뿌리는 구한말의 전옥서(典獄署)로서, 1904년 경무청감옥서로 바뀌고, 1908년 현저동에 경성감옥(京城監獄)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의왕시로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기업인·세도가·군장성·재야인사·운동권 학생 등과 이 밖에 살인·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간첩·잡범 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 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 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독방 감옥들이 남아 있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부른다.
신중현은 1979년 마흔이 넘은 나이로 컴백하여 신중현과뮤직파워, 세나그네 같은 밴드를 결성했지만 활동은 미진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언론과 음악비평계는 그의 음악사적 의미를 재조명했으며, 봄여름가을겨울, 강산에, 윤도현, 한영애를 위시한 뮤지션들은 헌정앨범 <A Tribute To 신중현>(1997)을 발표했다.
2006년 11월 신중현은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은퇴를 선언하고, 은퇴공연을 가졌다. 인천에서 시작한 그의 공연은 전국을 돌고 마지막으로 서울에서 45년 음악 인생의 대미를 장식한 후 한국 록 음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남았다. 그는 오늘날 ‘우리 음악의 뿌리가 없다’는 사실을 문제점으로 꼬집고 ‘대중음악이라면 그 나라의, 국민적이고 토속적인 문화를 담고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외국의 음악에 치우친 경향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1989년에는 에버랜드 팝스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역임했으며, 수원여자대학 생활음악과 전임강사로도 활약했었다.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촉촉한 빗방울이 너덜거리는 우리네 세상을 환하게 씻어주시면 좋겠다. 초점이 흐릿한 정충(政蟲, 권력에 눈이 먼 벌레들)들의 눈동자도 맑게 씻어주면 좋겠다. 마음속의 불덩어리를 달구고 있는 백성(국민)들, 새 술을 담을 새 옹기를 만들 가마터를 데우고 있을, 그들에게 듬직한 마음의 풍구(風甌)를 보내드린다. 그들이 불덩어리를 던질 날이 가까이 오고 있다. 투표(投票)의 ‘표(票)’는 ‘불똥 뛸 표’이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