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출전에서 승리한 이순신 장군은 1592년 6월 10일(이하 음력) 여수의 전라좌수영으로 귀환하여 머물고 있었다. 이때 경상도의 적세를 탐문하였더니, 가덕과 거제 등지에 왜선이 10척 내지 30척 규모로 출몰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순신 장군은 7월 4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 7월 6일 제3차 출전을 결행한다. 이날 남해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 우수사 원균이 수리한 전선 7척을 거느리고 나와 있었다.
노량에서 연합함대를 편성한 조선수군은 진주 땅 창신도(경남 남해군 창선도)로 나아가 밤을 새웠다. 7월 7일 날이 밝자 동풍이 세게 불어 배를 움직이기 어려웠으나, 가까스로 항진하여 해 질 녘에 고성 땅 당포(통영시 산양읍 삼덕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무를 하고 물 긷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당포 목동 김천손이 이순신함대를 보고 급히 달려와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김천손은 "적의 대선 중선 소선을 합하여 70여 척이 미시(오후 2시)에 영등포(거제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로부터 내려와 거제와 고성의 경계인 견내량(통영시 용남면과 거제시 사등면 사이의 좁은 협수로)에 머물고 있다"는 고급 정보를 이순신 장군에게 전했다. 미륵도 목장에서 말을 돌보는 목자의 신분인 김천손은 그날 견내량 근처에 나가 있다가 대규모 적 선단이 나타나자 급히 당포로 달려온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손의 제보를 바탕으로 작전계획을 수립한 이순신 장군은 다음 날인 7월 8일 아침 일찍 미륵도 남단을 돌아 적이 있는 견내량 쪽으로 향했다. 이때 선봉으로 나와 있던 적의 대선 1척과 중선 1척이 이순신 연합함대를 보고 견내량 쪽으로 들어갔다. 조선수군이 이들을 추격해 들어가니 견내량에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이 정박해 있었다. 김천손의 제보 내용과 거의 일치하는 적선 숫자다.
그런데 견내량은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이 기동하기 힘들고, 적들이 불리해지면 육지로 도망갈 가능성이 있어,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한산도 앞 바다로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해버릴 계획을 세웠다. 한산도는 사방으로 헤엄쳐 나갈 길이 없고 혹시 적이 상륙한다고 해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판옥선 5~6척을 보내어 선봉으로 나온 적을 추격하며 싸움을 걸게 했다. 그러면서 본대는 한산도 앞바다 쪽으로 후퇴하는 척했다. 그러자 적들은 일시에 돛을 달고 추격해 나왔다.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자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을 선두로 하여 학익진을 펼쳐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적의 선봉 2~3척이 격침되자 후미의 적들이 우왕좌왕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틈을 이용하여 조선수군은 각종 총통과 불화살을 쏘면서 적을 격멸하기 시작했다.
이날 적선 73척 중 59척이 격침 또는 나포되고, 총통과 화살을 맞아 물에 떨어져 죽은 자의 수는 헤아릴 수 없었다. 그중 일부인 약 400명은 기진맥진 헤엄을 쳐서 한산도로 올라갔다. 격침 또는 나포된 적선의 사상자와 도주한 배 14척에 승선한 사상자까지 합치면 대략 9천 명 정도의 왜군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수군도 전사 19명 부상 115명 등 사상자가 나왔으나 결과는 압도적 승리였다. 전투는 거의 온종일 이루어졌으며 후미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조선수군이 쏜 화살을 맞고 중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개전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그날 견내량 안쪽 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한산대첩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그 이전까지의 해전이 주로 해안 포구에 있는 적을 공격하는 소규모 전투였다면, 한산대첩은 넓은 바다 한가운데서 양국의 주력 수군이 제대로 한 판 맞붙은 대규모 해전이었다. 조선수군은 거북선 3척과 판옥선 56척이 참가했고, 왜군도 대소 전함 73척이 참전하여 개전 이래 최대의 해전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벌어졌다.
임진왜란 3대첩 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기점으로 조선수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하고, 부산에서 서울이나 평양으로 가는 적의 해상 보급로를 완벽하게 차단해버렸다. 이로써 임진왜란 전체의 승기를 잡고, 곡창인 호남을 보전할 수 있었으며 전쟁의 판도를 뒤집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에서 승리했던 요인은 선승구전(先勝求戰)으로 요약된다. 전투 장소를 견내량이 아닌 한산도 앞바다로 택한 것은, 협소한 견내량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적의 장기인 등선육박전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포격전 위주의 당파전술을 구사하는 조선수군에게 유리한 넓은 바다를 택했던 것이다.

견내량에서 종대 대형으로 추격해 내려오는 적을 포위 섬멸하는 진법인 학익진을 구사한 것은 진법의 대가인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적 선두부터 집중포화를 퍼붓는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주효했다. 돌격선인 거북선을 적진으로 돌입시켜 적의 진용을 흩트려 놓은 것도 주요한 승리 요인 중 하나다. 제일 큰 승리 요인은 역시 사람이다. 지휘관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웠던 조선수군은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그리고 조선의 민초였던 당포 목동 김천손의 제보가 한산대첩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김천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부 연구가들이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 나오는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던 같은 섬의 목동 김천손이 신 등의 배를 바라보고 급히 달려와 말했습니다. 避亂登山, 同島牧子金千孫, 望見臣等舟師, 奔遑進告內"라는 내용 중 '피란등산 避亂登山'이라는 문구에 집착하여, 당일 김천손은 당포 뒷산인 미륵산(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정상에 올라가 있다가 견내량에 도착한 왜선을 바라보고 급히 하산하여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미륵산에서 견내량까지는 직선거리가 약 10km이다. 날씨가 청명한 날 미륵산에서 바라보면 견내량에 있는 거제대교가 보인다. 그러나 이런 날은 일 년 중 많지 않다. 김천손은 대선 중선 소선을 합친 적선의 숫자를 거의 정확하게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했다. 미륵산 꼭대기는 아무리 날씨가 좋은 날에도 견내량에 밀집대형으로 정박해 있는 적선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거리에 있다.
그날 김천손은 적어도 적선의 숫자와 크기를 식별할 수 있는 약 300미터 이내의 지근거리에서 대규모 적 선단을 세밀하게 관측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시간적으로 보아도 미시(오후 2시)에 견내량을 출발하여 급히 당포로 달려갔다면 도착 시간은 해 질 녘(日暮)이 되어 이순신 장군의 기록과 일치한다. 만약 김천손이 미륵산에서 견내량의 적선을 바라보고 당포로 내려왔다면 오후 4시 이전의 여름날 해가 중천에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을 만났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피란민들을 묘사할 때 보통 "피란하여 산으로 올랐다"라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인 조선에서 해안지방이나 평야지대의 백성들이 피란할 곳은 산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적진포해전 당시 향화인 피란민인 이신동을 묘사할 때에도 "산 정상으로부터 그 아이를 업고 내려와(自山頂負其兒子)"라는 표현을 썼고, 2차 출전 당시 경상도 연해안 지방의 피란민들을 묘사할 때에도 "남녀노소의 피란민들이 산골에 숨어서. 父老士女 避亂之輩 竄伏山谷"라고 했다.
율포해전에서 구출한 천성 수군 정달망도 왜군에게 포로가 되기 전 "부모를 따라 산으로 들어갔다. 隨父母入山"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의 이런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피란을 가는 것은 산에 오르거나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임을 알 수 있다. "피란등산 동도목자김천손 避亂登山 同島牧子金千孫"이라는 문구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
김천손은 무더운 여름날 견내량에서 적 선단을 확인하고 당포까지 구불구불한 해안 길 약 20킬로미터를 달려가서 이순신 장군에게 결정적 제보를 했다. 아테네의 페이디피데스는 마라톤 전장의 승전보를 알리고 절명했지만, 조선의 민초 김천손은 먼 거리를 달려와서 승리에 결정적인 제보를 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래서 김천손은 페이디피데스보다 더 위대한 조선의 민초임에 틀림없다. 필자는 오래전 통영시에 '김천손 마라톤대회' 개최를 제안했다. 그것이 받아들여져 해마다 한산대첩축제 기간에는 견내량과 가까운 미늘고개에서 출발하여 당포까지 달리는 '이순신배 김천손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순신전략연구소장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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