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해 보길도를 다녀왔다. 윤선도와 보길도는 동전의 앞과 뒤처럼 서로 붙어 있다. 보길도를 가면 윤선도의 정원 ‘세연정’ 일대를 둘러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나는 그때 보길도 남원사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바다는 은빛 물결로 찰랑거리고 보길도는 햇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동네 어귀에서 남원사 가는 길을 물으니 늙은 여인은 쳐다보지도 않고 게으른 스님이 사는 절엔 왜 가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게을러빠진 스님은 청소를 안 해 발 디딜 곳도 없이 지저분하니 가지 말라고 한다. 그래도 꼭 가봐야겠다고 우겨 겨우 가는 길을 알아내서 올라갔다. 바다 안개에 묻힌 남원사는 신비로웠고 주지 스님은 연신 미안하다며 앉을 자리를 닦아 주었다. 게으른 스님의 게으른 수행을 바다 안개가 감싸 주었는지 모른다. 보길도는 그렇게 윤선도보다 먼저 남원사가 내 안으로 들어왔었다.
윤선도도 어부사시사를 지을 때 어부를 만난 건 아니다. 고려 때부터 전해오던 ‘어부가’와 연산군 때 이현보의 ‘어부사’를 바탕으로 다듬고 윤색해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보길도에 은거하며 머리 아픈 세상일 잊고 노래나 부르면서 살고 싶었을 윤선도의 심정이 절절하게 묻어 나오는 어부사시사를 읊고 있으면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조선판 ‘나는 자연이다’의 주인공처럼 세상일 모두 잊고 산 것일까. 정치 모리배들을 피해 스스로 보길도에 가둔 것일까. 뭐가 되었든 보길도는 결국 윤선도가 먹여 살리고 있으니 뛰어난 문학의 힘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돌고 돈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 송시열에게 밀려났지만, 남도에서 유유자적하며 빛나는 유배문학의 주인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는 건 오히려 새옹지마가 아닌가.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
날이 따뜻해졌도다. 물 위로 고기 뛰논다.
닻을 들어 올려라. 닻을 들어 올려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
낚싯대는 손에 쥐어져 있다. 막걸릿병은 실었느냐
‘어부사시사’를 읽고 있자면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시로 그려진 그림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낚싯대는 손에 쥐어져 있다. 막걸릿병은 실었느냐’ 어부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해 줄 막걸리를 어찌 잊고 싣지 않을 수 있을까. 어부들은 예나 지금이나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면서도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어부에서 어부에게로 이어져 왔다. 민초들의 삶이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던가. 그런 민초들의 노래에는 한이 서려 있고 슬픔이 스며들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부사시사’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깃들어 있는 것 같다. ‘나 힘들어 죽겠어’가 아니라 ‘인생 다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냥 즐겨’라는 무한긍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읽어도 이상하게 좋다. 힘이 난다. 보길도 앞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어부들과 함께 막걸리 한잔하고 싶어진다.
유배를 왔을지언정 다 가진 금수저 윤선도와 어부들은 친구가 되었을까. 어부들의 노래를 부르며 유배의 시간을 달랬지만 정작 어부들과의 우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우가’의 다섯 벗이 물과 돌과 소나무와 대나무와 달뿐인 것을 보면 신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나 보다. 아름다운 세연정에서 음악과 춤으로 인생의 덧없음을 달래며 라이벌 송시열이 언제 정치적 나락으로 떨어지나를 고대하고 있었을까. 임금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리며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 노래를 불렀을까. 모든 걸 포기하고 ‘시나 짓자’하면서 살았을까. 그 어떤 마음이었든 간에 문학은 윤선도에게 삶이라는 강을 건너는 나룻배였을 것이다.
보길도는 윤선도의 나라다.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세연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눈에 담긴 풍경을 시로 짓고 노래를 불러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일 따위는 다 잊고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 노래 부르며 막걸리를 친구 삼아 보길도의 신선이 되고 싶었는지 모른다. 초야에서 유유자적하며 자연인으로 살아가려면 예나 지금이나 사실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윤선도는 친아버지 윤유심과 양아버지 윤유기로부터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았다. 노비만 해도 육백 명이 넘었다고 하니 그 재산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조선판 삼성이었던 조상 해남윤씨의 덕이다. 해남윤씨 가문은 부富를 남용하지 않고 실용적인 경세치용사상을 펼쳐서 해남 일대를 경영했다. 갑질하지 않고 더불어 사는 법을 일찍 터득했던 가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섬은 결핍이다. 육지로부터 격리된 섬은 외로움이며 고독이다. 윤선도가 사랑한 보길도는 윤선도처럼 결핍과 외로움과 고독으로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결핍이 시가 되고 외로움이 희망이 되며 고독이 사상으로 승화되었을 것이다. 보길도는 윤선도로 인해 그 이름이 빛나고 그 이름은 보길도 어부들의 노래로 최고의 문학이 되었다. 윤선도의 유토피아 보길도에서는 지금도 어부들의 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막걸리를 마시며 ‘날이 따뜻해졌도다. 물 위로 고기 뛰논다. 닻을 들어 올려라. 닻을 들어 올려라. 갈매기 둘씩 셋씩, 오락가락하는구나. 찌그덩 찌그덩 어기여차’ 어부들의 노래가 어서 보길도로 오라고 나를 부르고 있다
누구나 유토피아 하나는 가지고 있지 않은가.
당신의 유토피아는 무엇인가.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