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사천여 년 전 인간 ‘아브라함’이다.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의 합수 근처인 메소포타미아 남부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가 70살이 되던 해 나를 낳으셨다. 나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하나인 셈의 9대손이다. 우리 조상들은 메소포타미아 동북부 카스피바다 인근에서 온 셈족 계통으로 창의성이 높고 부지런하며 설형문자를 만든 뛰어난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수로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끌어와 너른 평원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었다. 또한 과수원이 발달하고 농경지가 많아 먹거리가 풍부한 곳이며 아름다운 정원도 잘 가꾸어 놓았다. 나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다. 그렇다. 아버지는 우상 숭배의 원조다. 달의 신을 주신으로 하여 많은 신들이 인간들의 믿음을 받으며 공존하는 땅 우르에서 우상 숭배는 이상할 게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처럼 많은 신들을 숭배하며 살았다. 대대로 내려온 조상의 땅에서 사는 일이란 그렇지 않은가. 삶이 세습되듯 문화가 세습되고 믿음도 세습된다. 내 고향 우르는 달의 신을 위한 신전들이 잘 건설된 곳이다. 오래된 문화와 역사는 우리의 자존심과 긍지를 한껏 높여 주었다.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은 늘 있었지만 그런 속에서도 사람들은 너른 초원을 유목하는 떠돌이가 되거나 한곳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정주민으로서 신들과 더불어 잘 살아왔다. 그렇게 나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처럼 삶과 문화와 믿음을 세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때 나의 나이 75살이었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나는 이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의 명령을 따라 이 땅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인간은 타락의 본성을 지닌 채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고 나로 인해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길 원했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온 인류에게 집중되었던 하나님의 관심이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나 하나에게 집중된 것이다. 나는 이 길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직감했다. 나는 막막하고 갈 바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었다. 내 인생의 전부를 걸고 가야 할 길이라는 걸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돈이나 명예나 정복을 위한 길이 아닌 고통과 고난의 길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생명의 길이다.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내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 길을 갔다. 하나님을 위한 약속의 땅은 멀고 험하지만, 가족을 이끌고 하란으로 떠났다.
종교의 도시 하란은 금석과 은으로 아름답게 장식한 신전에서 달의 신을 섬기며 숭배했다. 나는 하란에 머물며 식솔들을 거두고 있었다. 아버지 데라는 우르를 떠나올 때 하나님을 섬기는 듯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신을 섬기기 시작했다. 그것을 안 하나님은 아버지를 두고 다시 가나안으로 떠나라고 명령하셨다. 아버지 데라를 홀로 하란에 남겨두고 나는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땅을 향해 길을 떠났다. 마음의 지도를 그리며 낮에는 걷고 밤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며 우르에서 하란으로 하란에서 베델로 베델에서 애굽으로 애굽에서 드디어 가나안에 도착했다. 이 끝없이 이어지는 고난의 길은 하나님을 위한 믿음의 순례였다.
그러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었다. 나는 문명의 중심지이고 물 걱정 없는 이집트로 떠났다. 나는 불안했다. 이집트 사람들이 아름다운 내 아내 사라를 빼앗기 위해 나를 죽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라를 누이라고 속였다. 누이가 틀린 말은 아니다. 사라는 내 이복동생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예상대로 이집트인 바로가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라를 궁전으로 데려갔고 그 대가로 나는 엄청난 재산을 받아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집안에 문둥병이 돌자 바로는 남의 여자를 취한 자기 잘못을 깨닫고 사라를 나에게 돌려보내 주었다.
나는 이집트에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제단을 쌓았다. 우르를 떠나와 타향으로 온 실향민인 나는 가나안을 새로운 영적 고향으로 삼았다. 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했다. 나는 이제 나의 기준을 내세우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우선해 모든 일을 판단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는 변화된 삶을 살았다. 나는 많은 재산을 모았고 조카 롯의 재산도 불어났다. 불어난 재산으로 인해 나와 롯은 이제 더 이상 같은 지역에 살 수 없었다. 나는 가장으로서 선택권을 포기하고 롯에게 분가하도록 선택권을 주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롭고 발달한 도시지역을 선택해 분가했다. 나는 척박한 산지인 헤브론에 정착했다.
조카 롯이 사는 소돔에 네 명의 왕이 뭉친 연합군이 쳐들어와 롯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집에서 훈련한 나의 사병 318명을 동원해서 롯과 소돔 사람들을 되찾아왔다. 이기고 돌아온 나는 예루살렘 제사장이며 왕인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나는 자식을 낳지 못한 채 25년을 살았다.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어찌 된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아내 사라의 충고를 받아들여 그녀의 몸종 하갈을 통해 내 나이 86세에 아들 이스마엘을 얻었다. 하갈에게서 아들을 얻게 되자 뜻밖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자녀 생산 능력이 없던 사라가 갑자기 생산 능력을 얻게 되어 아들 이삭을 낳았다. 내 나이 100세였다.
두 아들은 무탈하게 성장했다. 그런데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 나는 망설임 없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하나님은 나의 믿음을 알아보시고 천사를 보내서 아들을 대신할 숫양을 제물로 주셨다. 그 후 하나님은 나에게 많은 자손을 주시고 그 자손들을 축복해 주셨다. 하나님은 나에게 해 주신 세 가지 약속을 지키셨다. 자손이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룬다는 약속과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약속과 나를 통해 모든 민족에게 축복을 주신다는 약속을 지켜주셨다. 나는 믿음의 조상이며 신앙의 아버지 아브라함이다.
내 무릎 위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 무슬림이 함께 앉아 있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