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고단한 인생 바다를 함께 건널 수 있는 소울메이트 하나 두고 있나 생각해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없다. 소울메이트는 고사하고 세상의 친구도 손을 꼽아 보니 그마저 망설여진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보지만 옹졸한 변명에 불과하다. 내게는 그런 소울메이트가 없지만, 다행인 것은 역사 속에 박제되지 않고 지금도 살아서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주는 다산 정약용과 개혁 군주 정조가 나눈 진정한 소울메이트의 우정을 보며 위로받는다. 실천적 지식인인 다산과 개혁가인 정조는 술도 마시고 학문도 나누며 신도시 화성도 건설하면서 깊은 정을 쌓았다. 두 사람은 18세기 꺼져가는 조선을 살려놓은 동지이자 깰 수 없는 신뢰를 가진 소울메이트였다.
다산은 가장 많이 쓰이는 명칭이 되었다. 서울시에는 ‘다산콜센터’가 있고 북극의 다산 과학기지도 있으며 한국경제신문사에서는 ‘다산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서강대학교, 아주대학교, 강원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세종대학교, 민족사관고등학교, 동양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는 ‘다산관’이 있다. ‘여유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크고 작은 건물들이 있고 예술인들의 사랑방도 있으며 각종 모임이나 단체도 정약용과 연관 있는 것이 많다. 정 많고 학식 높고 천재적인 다산에게 조선은 문제적 나라였을 것이다. 이 비루한 조선에 태어나 뜻을 다 펼치지도 못하고 긴 유배에 들어갔지만, 오히려 다산의 진면목이 발휘되는 기회로 작용했다. 어둠이 있으면 밝음이 있듯이 다산의 빛나는 문학이 우리에게 얼마나 값진 선물이 되었다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회는 부패했고 모함이 판치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었다. 이십 년 유배살이로 인생을 담보 잡힌 다산은 우울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는 그 우울함을 딛고 민중을 위한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우울할 틈이 없이 실천적 삶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말이 쉬워 500권이지 실제로 500권을 쓴다는 것은 초인적인 힘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다산의 지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겠지만,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다산의 문학은 부패한 기득권에 대한 임상보고서이며 절망에 빠진 민중을 위한 보약이었다. ‘홀로 웃다’라는 시를 보면 인생의 모순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양식 많은 집은 자식이 귀하고
아들 많은 집은 굶주림을 걱정한다.
높은 벼슬아치는 꼭 어리석고
재주 있는 사람은 재주를 펼칠 길이 없다.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쇠퇴하기 마련이네.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이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이다.
보름달 뜨면 구름이 자주 끼고,
꽃이 활짝 피면 바람이 불어대지.
세상일 모든 이치가 다 이와 같으니
나 홀로 웃는 까닭 아는 이 없어라.
완전은 늘 불완전을 동반하는 게 세상 이치다. ‘홀로 웃다’는 다산이 1804년 7월 무더운 여름에 유배지 강진에서 쓴 시다. 그 여름, 장마가 지다가 태양이 익다가 하는 강진에서 이 시를 쓰며 도인처럼 홀로 웃고 있었을 것이다. 소울메이트 정조가 죽고 난 뒤 마흔세 살의 다산에게 ‘펼칠’ 길은 무너지고 가슴에는 절망이라는 돌덩어리가 덩그러니 얹혀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시처럼 허탈하게 홀로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시는 인간적인 삶을 보편적인 정서로 그대로 표현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완전한 복을 갖춘 집 드물고, 지극한 도는 늘 쇠퇴하기 마련이네. 아비가 절약하면 아들이 방탕하고, 아내가 지혜로우면 남편은 바보다’라는 다산의 시구가 틀리지 않는 것은 세상사다. 그래서 부족한 인생도 모자라는 인생도 이 시를 읽고 웃으며 위로받는다.
다산은 21세기 가장 뜨거운 키워드로 부활했다. 다산의 실용리더십이 그 힘을 발휘할 시대가 온 것이다.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멀티플레이어의 리더십이 21세기에 꼭 필요한 리더십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유학자이자 법학자이며 지리학과 의학에도 학문이 깊은 실학자로 다재다능했다. 그런 다산의 풍성한 경험은 그의 대표작 저서 ‘목민심서’로 나타난다. 지금 학계나 문화계 나아가 사회 전반에 ‘다산학’이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조선판 스카이캐슬보다 더한 아버지가 다산이다. 대학자의 향학열은 세계 최고다.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글이 있다.
“오직 독서만이 살아나갈 길이다.”
북한에서는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다산을 칭송한다. 공동경작과 공동 분배가 공산주의의 상징이지만 정작 북한에서 다산의 목민심서는 금서라는 게 아이러니다. 다산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실학주의자이기에 공산주의자와는 그 결이 다르다. 그러하기에 세계 상석에 뛰어난 학자로 내세워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오래전에 강진만을 여행하며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을 방문했었다. 다산의 흔적을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다산초당을 올라오던 원불교 정녀와 순간 스치며 지났다. 정갈한 그녀가 왠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정갈함과 다산의 유배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겠지만, 오랫동안 다산이 자꾸 그녀와 겹쳐 생각났다.
나는 ‘홀로 웃었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