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찰서 민원실로 들어선다. 몇 달 전, 오토바이 사고로 병원 생활을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교통사고 사실관계 확인서를 대신 발급 받기 위해서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순경이 반갑게 맞으며 친절히 묻는다.
“선생님, 어떤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어딜 가든 흔하게 들을 수 있는 한마디가 이곳에서는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전에는 무슨 볼일로 경찰서를 찾아가면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왠지 고압적으로 흐르는 무형의 기류에 공연히 마음이 움츠러들곤 했었다.
시쳇말로 경찰서와 법원은 될 수 있는 대로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소리가 있지 않던가. 길거리에서 교통순경만 눈에 띄어도 일쑤 주눅이 드는 판에 경찰서를 드나든다는 것이 분명히 썩 달가운 일은 아니어서이다.
가만히 헤아려 보니 몇 가지 달라진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남자 직원 일색이던 경찰서에 여자 직원이 생기면서 확연히 밝아진 분위기가 감지된다. 왠지 남자보다는 여자가 훨씬 부드럽고 친절한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이다. 여자 경찰관이 그곳 정서의 변화에 톡톡히 한몫을 하고 있다.
분위기뿐이 아니다. 호칭도 바뀌었다. 예전에는 민원인을 으레 ‘00 씨’라고 불렀다. 그랬던 것이 오늘 들은 소리는 ‘00 선생님’이다. 어쩐지 대접을 받는 듯한 느낌이 들기에 기분이 그리 나쁘지가 않다. 그저 호칭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도 받아들여지는 마음은 백팔십도로 달라지는 것 같다. 어찌 생각하면 별것 아닌 변화가 큰 차이를 가져다준다. 무척 신선하고 바람직스러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싶다.
이러한 호칭의 변화를 요즈음 여러 곳에서 맞닥뜨리곤 한다. 병원들 역시 이제 어떤 데를 가도 예전처럼 ‘00 씨’라고 부르지 않는다. 대신 ‘00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씨’와 ‘님’ 둘 다 똑같이 “이름이나 호칭 또는 다른 명사 뒤에 붙어 존경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풀이가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살피면 당연히 ‘씨’가 높임의 의미로 통해야 마땅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ㅆ’이 들어가는 다른 여러 말들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어감 때문일까, ‘씨’라는 표현에는 어쩐지 존대는커녕 심지어 듣는 사람을 은근히 낮추어 일컫는 것 같은 묘한 뉘앙스가 풍긴다. 언제부터인가 병원이나 관공서처럼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곳에서 ‘~씨’ 대신 ‘~님’ 혹은 ‘~선생님’ 같은 다른 호칭으로 바꾸어 부르는 것을 보면, 대다수가 그리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비록 본뜻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언어생활에서 어감이라는 것을 영판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 ‘씨’ 비슷한 용례는 ‘당신’이라는 말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씨와 당신의 경우가 똑같지는 않다. ‘씨’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 가지 뜻으로만 쓰이는 반면, ‘당신’은 2인칭 평칭, 2인칭 비칭 그리고 3인칭 극존칭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사전상의 용도로는 그러할지라도 일상적인 언어활동에서는 ‘당신’이라는 낱말이 왠지 그 대상을 다소 비하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 앞에서 될 수 있으면 “당신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말은 삼가게 된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같은 값이면 어감이 좋은 호칭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는 것이야말로 돈 안 들이고 점수 따는 가장 손쉬운 방법 아니겠는가. 일상사에서 무심코 주고받는 호칭 하나도 듣는 이를 염두에 두고 사용해야 할 일임을 경찰서 민원실을 방문하면서 새삼 깨우친다.
볼일을 끝내고 정문을 나선다. 세상이 한 걸음 한 걸음씩 아름다운 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고 있다는 생각에 한동안 울울하던 기분이 한결 밝아온다.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