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세상을 밝히는 책 《아침놀》에는 이런 기도 소리가 있습니다. “아아, 그대 하늘이시여, 제발 광기를 주소서! 마침내 내가 나 스스로를 믿을 수 있도록 광기를!” 자기 자신을 믿는 것이 광기입니다. 미친 짓입니다. 니체는 광기를 요구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믿기 위해!
광기는 비광기를 전제합니다. 정상이 비정상을 전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옳음은 틀림을 전제하고, 정답은 오답을 전제하며, 빛은 어둠을 전제합니다. 현상의 세계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원리가 작동합니다. 현상계에서는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의 창조는 그저 신화나 성경의 논리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상이 본질을 전제합니다.
‘아침놀’은 삶을 현상의 의미로 밝혀 줍니다. 어둠에서 빼내 빛 속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빛도 있지만, 정신을 밝히는 빛도 있습니다. 몸으로 살아야 하는 삶도 있지만, 생각으로 살아야 하는 삶도 있습니다. 세상을 밝히는 아침놀도 있지만, 정신의 세계를 밝히는 아침놀도 있습니다. 창문 밖에서 뜨는 태양도 있지만, 마음속, 즉 내면의 세계에서 뜨는 태양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면의 태양은 ‘마음먹기 나름’이라서 문제가 복잡해집니다.
중세 천 년을 향해 근대인들은 ‘암흑기’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만 인정하며 저세상을 동경했고, 그런 내세를 염원하는 동시에 현세에서는 늘 죽음의 현상을 면전에 두고 살았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이것만이 중세의 정신과 그 현실을 지배했습니다. ‘죽을 것이니까, 신을 믿고 하늘나라 가야겠다!’는 다짐만 거듭했던 것입니다.
빛을 상실했던 시대, 그 중세는 근대의 정신에 의해 저물었습니다. 근대의 태양은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태양은 아직 정오의 위치에도 다가서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아침놀’의 현상에 머물러 있는 듯합니다. 날이 밝아오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흘러 줘야 할 것 같습니다. 니체의 음성은 여전히 어디선가 잠시 모습을 드러낸 번개 같고 또 먼 곳에서 우르릉 거리는 천둥 같습니다. 그것이 음절을 갖춘 소리로 들리려면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 것 같습니다.
늙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아침이다. 나의 하루의 시작이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이것은 차라투스트라의 유언입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에게 허락한 마지막 대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즉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복음 27:46) 하며 인간적인 한계를 드러내며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했다면, 차라투스트라는 한계에 직면하여 새로운 세계를 예감했고, 그 세계로의 모험 여행을 다짐하며 삶과 작별을 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대한 정오는 위대한 죽음에 대한 예감이고, 신을 죽인 후 새로운 신의 출현을 예고해 줍니다. 삶을 능동적으로 마감하고 또 다른 삶의 형식 속에서 신으로서의 존재로 거듭나는 찰나입니다. 한계에 직면했던 정신이 그 한계를 넘어선 후 새로운 한계를 멀리 두고서 ‘야호!’ 하고 함성을 질러 대는 순간입니다. 아침놀은 새로운 정신의 출현에 대한 현상입니다.
중세의 소리가 ‘메멘토 모리’였다면, 니체가 들려 주는 소리는 ‘메멘토 비베레’, 즉 ‘삶을 기억하라’입니다. ‘삶을 기억하기!’,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또 다른 모험 여행입니다. 파도가 영원히 밀려 와도 그 영원 앞에서 또 다른 무한의 형식을 깨달아 주면 됩니다. 누구나 죽을 것입니다. 죽음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준을 중세에 두고 나면 니체는 광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기준을 삶의 형식으로 옮기고 나면 그가 하는 말은 인간적인 위로와 응원의 소리로 변해 줄 것입니다. 그때는 ‘어서 오라! 나의 한계여!’ 하며 뱃사람의 우렁찬 함성과 함께 용감하게 떠나 주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