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질서도 반복되면 하나의 질서가 된다. 무질서로부터 질서를 찾아내기 위해 시인은 시를 쓴다. 시는 태어나기 위해 시인을 찾아온다. 시인에게서 태어난 시는 격렬한 감정의 불길 속에서 몇 번이나 담금질 당하고 난 뒤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겨우내 굶주림과 추위를 견디고 어느 날 불쑥 찾아온 봄처럼 말이다. 땅을 뚫고 나온 작고 여린 생명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다. 그렇게 태어나 잘 자란 시지만 음식점의 저녁 한 끼보다 싸다. 사람들은 거나하게 육신의 에너지를 채우고 배를 두드리며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살이 찔까 봐 죽어라 운동하고 다이어트를 한다. 허기진 영혼은 그대로 버려둔 채 말이다. 식사 한 끼보다 싼 시집은 서점 진열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늙어가고 있을 뿐이다
한 줄의 시에 마음을 빼앗겨 본 사람은 안다. 시를 읽으면 세상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달라진다. 나에게 있는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고통도 사랑하게 된다. 가슴이 막혀 숨 쉴 수 없을 때 그 숨구멍을 터 주는 것이 시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그냥 다 놓아 버리고 싶을 때 옷자락을 붙잡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시다. 그런 시가 내게로 온다면 시를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시가 내게로 오지 않으면 내가 시를 찾아가면 된다. 찾아서 내 ‘시’로 만들면 된다. 그러면 그 인생은 실패하지 않는다. 시 안에는 수많은 사랑의 세포가 살아서 함께 살아가 줄 것이기 때문이다. 달콤한 사탕을 원하는 과부하 걸린 뇌를 부패하지 않게 해주는 소금 같은 것이 바로 시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내게로 왔다’는 가슴으로 이해하면 된다. 네루다도 말하지 않던가. ‘몰라 시가 어디서 왔는지’ 그러니까 시가 그의 인생이고 시인은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사다. 지루한 일상이 갑자기 달라 보이면 그게 바로 시라고 네루다는 말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물건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는지 생각하지 않는다. 없으면 못살 것 같은 핸드폰을 비롯해 아침마다 바르는 로션, 거울, 신발, 가방, 커피, 밥 등 헤아릴 수 없는 사물과 자연과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어느 날 문득 달라 보이게 되면 마음의 시가 찾아온 것이다. 시의 다른 말은 사랑이다. 사랑이 문득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혹은 내가 혼자 돌아올 때
그렇게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시인들은 왜 다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네루다도 예외는 아니다. 네루다는 칠레의 공산당원이며 정치가였고 시인이었다. 이념의 귀신이 남미를 홀리고 있을 무렵 그는 철학자 사르트르와 혁명가 체 게바라, 공산주의자 모택동, 히틀러 등과 교류했다. 평생 이 나라 저 나라 떠돌아다니면서 망명하는 고달픈 삶을 살았다. 네루다는 1966년 미국에서 열린 ‘국제펜클럽대회’에 참가해서 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쿠바 혁명을 옹호하는 시를 낭송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유라는 시인의 운명과 마주하며 민중시의 저변을 확대해 나가 1971년 노벨상을 받았다. ‘모든 꽃을 꺾을 수는 있어도 봄이 오는 건 막을 수 없다’는 네루다는 이데올로기로도 감금할 수 없는 리얼리스트였다.
시를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것이 시인이다. 어느 땐 겨드랑이가 가렵고 또 어느 땐 얼굴이 가렵고 또 어느 땐 머릿속이 가려워 박박 긁는다. 긁고 또 긁어야 시원해지는 것처럼 시인은 가려운 곳을 긁지 않으면 병이 나는 사람이다. 사람들의 정신에 달라붙어 기생하는 진드기를 한 편의 시로 박박 긁어서 떼어줄 때 시인은 비로소 존재의 기쁨을 느낀다.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라는 시구처럼 비속한 것도 없고 신성한 것도 없으며 주인도 없고 노예도 없는 그저 존재 그 자체로 빛나는 의미를 주는 게 시인이다. 시가 내게로 왔듯이 내가 시에게로 가는 날도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버려두었던 황무지에 씨를 뿌리는 봄이면 좋겠다. 왜 버렸는지 왜 버린 땅을 찾지 않았는지 반성하지 말자. 버려두었던 것이 아니라 묵혀두었다고 생각하자. 묵혀두는 동안 잡초가 자라나고 벌레들이 찾아오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렸다.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비옥해진 황무지에 시가 찾아오도록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겠다. 불에 탄 상처를 해독해 가며 네루다처럼 고독해져 갈 때 가슴에서 날아온 언어의 씨들이 시가 될지 모른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 황무지에는 시가 주렁주렁 열릴지 모른다. 잘 익은 ‘시’를 하나 딴 네루다가 속삭인다.
‘내 가슴은 바람 속에서 멋대로 날뛰었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