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한참 동안 찾아 헤맸습니다. 바로 곁에 두고서 온 방안을 뒤졌습니다. 김소월의 시집을. 분명 그 표지는 몇 차례 나의 시선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입니다. 미안했습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오늘따라 이 구절을 아리도록 읽고 싶었습니다. 미처 ‘몰랐던 달’이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고려 시대의 천재 화가 혜허의 〈수월관음도〉는 늘 생각을 이끄는 아리아드네의 실 같습니다. 이 그림은 시시때때로 ‘보는 법’과 관련하여 생각을 거듭하게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그림이 지닌 치명적인 매력입니다. 생각이 떠나지 않게 꼭 붙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물방울! 〈수월관음도〉는 바로 이 형식 속에 담겨 있습니다. ‘수월水月’, 즉 ‘물 위에 비친 달’이 이 제목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달을 찾을 수 없습니다. 달이 있어야 할 위치쯤에 선재동자가 조그만 개구리처럼 무릎을 꿇고 있을 뿐입니다. 그려 놓았으니까 제목을 그렇게 정했겠지요! 그런데 없습니다. 정말 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수월’ 다음에 적어 놓은 개념은 ‘관음’입니다. ‘관음觀音’, ‘소리를 본다’는 말입니다. 중생衆生들은 소리를 귀로 듣는 것에서 만족하겠지만, 깨달은 자는 소리를 보는 경지에까지 도달한 것이라는 얘깁니다.
소리는 볼 수 없습니다. ‘모순’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달을 보고 있습니다. 달이 전하는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정말 수수께끼 같은 소리입니다.
〈수월관음도〉와 관련해서는 이미 몇 번의 칼럼을 썼습니다. 과거의 것을 뒤져 보았습니다. 〈달을 보았는가?〉와 〈가짜의 가짜를 보고 진짜를 알다〉가 그것들입니다. 이것으로 완성된 것 같지 않아서 다시 생각을 꺼내 듭니다. 결과물에 만족할 수 없어서 다시 생각에 몰두해 봅니다. 물론 지금도 당장 얻어낸 결과에 대해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도 이 그림에 대해 질문을 던질 것입니다.
‘동용아! 달을 보았는가?’
이 질문과 함께 숨을 거두게 될 나의 모습을 연상해 봅니다. 죽는 순간에라도 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달을 보았다면 미소를 짓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웃으며 삶과 작별하고 싶은 것이 나의 작지만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런 작별을 하려고 지금도 애써 생각에 임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 달 전 즈음, 어떤 출판사에서 원고 청탁을 해 왔습니다. ‘코로나로 지친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는 책을 한 권 써달라’는 요구였습니다.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그러면서 고민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생각을 이끌고 있는 것이 또 다시 〈수월관음도〉입니다.
세상이 어두웠습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모임과 만남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마스크로 입과 코를 가리라는 말이 일상을 지배했습니다. 그것을 즐기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편을 느꼈습니다. 상인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들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현실이란 벽 앞에서 힘없이 쓰러져만 갔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시작이란 말을 해야 할 때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을 양심의 소리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해 내야 합니다. 그런 철학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 선두에 ‘나’ 자신을 세우고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합니다. 정말 힘들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힘든 한 걸음이 큰 의미를 남길 족적이 될 것입니다.
‘험한 세상 살다 보면!’
요즈음 이 말이 나의 생각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말이 하늘의 뜻과 대지의 뜻을 연결시켜 줍니다. 그러면서 선재동자처럼 쇼펜하우어의 강아지 ‘아트만’이 재롱을 떨며 생각을 이끌어 줍니다. 눈물로 채워졌다는 바다 위에, 그 고해 위에, 나는 나의 아르고 호를 띄웁니다. 힘찬 항해를 위해 떠나려는 나의 정신에게 응원가를 불러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