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삼천여 년 전 인간 ‘크리슈나’다. 사계절 온화하고 먹을 것이 풍부해 사람과 동물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도 마투라의 야다바 가문에서 아버지 데바카와 어머니 바수데봐 사이에 태어났다. 그런데 내가 갓 태어났을 때 새로 태어난 모든 갓난아기는 죽이라는 왕의 명령이 있었다. 백성들을 괴롭혀 온 이 악마와 같은 캄사왕은 나의 삼촌이었다. 삼촌은 여동생인 나의 어머니가 낳은 아들에 의해 머지않아 살해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다 죽였다.
아버지는 삼촌의 눈을 피해 이제 막 태어난 나를 바구니에 담아 이 땅을 탈출하려고 강에 들어섰다. 아버지는 깊고 험한 강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몰라 두려움에 떨었다. 악마의 왕 삼촌에게서 빨리 벗어나야 나를 살릴 수 있을 텐데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맞닥트렸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통했을까. 그때 거짓말처럼 강물이 두 갈래로 쫙 갈라졌다. 아버지는 바구니에 담은 나를 데리고 두 갈래로 갈라진 강 속의 길을 따라 탈출에 성공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탈출에 성공한 나는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걱정 없이 자랐다. 악마 같은 삼촌이 없는 땅에서 우리 가족은 평온한 날들을 보냈다. 어른들은 내가 활짝 웃는 모습만으로도 행복해했고 내가 곤히 잠자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들은 평화를 느꼈다. 나는 가족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무탈하게 무럭무럭 자랐다. 꼬마들의 놀이터인 골목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싸움질도 하면서 골목대장이 되었다.
나의 지도자 기질은 목동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다. 남들이 대적할 수 없는 강한 힘을 발휘해서 독룡 카리야를 퇴치하기도 하고 고바로다나산을 들어 올려 폭풍으로부터 목동과 소를 지키기도 했다. 또한 소를 몰고 다니며 피리를 불면 피리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고 청아한지 사람들이 내 피리 소리에 매혹되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며 행복해했다. 그렇게 나는 목동의 대장이 되었다.
삼촌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고 나를 죽이기 위해 자객을 여러 번 보냈지만 나는 이들을 모두 물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은 나의 비범한 힘을 알아보고 나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삼촌은 다시 나를 죽이기 위해 미리 함정을 파놓고 자신의 성으로 나를 초대했다. 나는 삼촌의 계략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초대에 응했다. 드디어 나를 도와줄 형과 함께 마투라로 귀환해 삼촌의 강력한 부하들을 모두 죽이고 마침내 삼촌 캄사까지 죽였다. 나는 삼촌의 왕관을 회수해서 삼촌에게 폐위당한 우그라세나왕을 다시 옹립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했다.
평화를 되찾은 나는 마투라에 머물며 나의 사촌들과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를 따르는 세력을 규합해 드와르카 지역에 정착해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아름답고 착한 왕비도 맞이해서 행복한 날들을 보냈다. 그런데 쿠루왕조의 패권을 놓고 판다바 형제들과 카우라바 형제들이 전쟁을 벌이면서 양측 모두에서 자기네들에게 가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 전쟁에 직접 가담하는 건 옳은 일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카우라바측에는 나의 병력을 빌려주고 판다라측에는 비전투요원으로 전쟁에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는 그렇게 사촌인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이자 스승이 되었다. 전차 뒤에 타고 있던 아르주나는 상대 진영에 있는 그의 친구와 스승과 할아버지와 친척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전쟁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전의를 상실하며 소리쳤다.
“크리슈나, 난 이런 전쟁을 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아르주나, 전쟁은 너에게 부여된 의무를 다해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야.”
나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은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업이므로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서라고 조언했다. 나의 이런 조언에도 아르주나는 망설이며 고뇌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비슈누의 화신이 되어 아르주나가 두려움을 이기도록 독려했다. 나는 전쟁을 치르면서 끊임없이 아르주나에게 설법했다. 선과 악 사이에 직면했을 때 삶의 본질은 무엇이며 도덕은 또한 무엇인지, 의무와 책임은 어떻게 주어지며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물질과 영혼은 무엇이며 내적 해방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르주나에게 조언했다. 아르주나가 다시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나는 설법을 펼치며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었다.
그대의 다르마는
그대에게 부여된 일을 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는 그대가 관여한 부분이 아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그것을 목적으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그대의 의무를 피하면 안 된다.
실수가 있고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다르마를 수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다르마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보다 낫다.
나는 쿠루크셰트라 전투가 끝난 뒤 드와르카로 귀환했다. 나는 지혜롭고 어진 정치를 펼쳐 왕국은 번영해 나갔다. 그러나 야다브족 사이에서 큰 분쟁이 일어나 나의 혈족 대부분이 살해당하는 불운을 맞이했다. 나는 비통하고 괴로웠다. 이곳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비탄에 잠긴 나는 왕좌를 내려놓고 숲속으로 들어가 은거하기 시작했다. 숲은 나의 고통과 비탄을 감싸주며 지친 영혼을 위로해 주었다. 세상의 시름을 모두 내려놓고 쉬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사냥꾼이 나를 사슴으로 오인해 화살을 쏴버렸다. 나는 사냥꾼을 원망하지 않고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나는 전 우주를 세 발자국으로 활보한 비슈누의 여덟 번째 아바타다.
[전명희]
서울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다 그만두고
‘밖철학연구소’를 설립해 연구에 몰두했지만
철학 없는 철학이 진정한 철학임을 깨달아
자유로운 떠돌이 여행자가 된 무소유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