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흥렬의 인문학적 글쓰기] 의자왕을 위한 변명

곽흥렬

고란사皐蘭寺 경내를 한 바퀴 휘~ 둘러보고서 낙화암落花巖으로 오른다.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이름의 낙화암,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의자왕이 나라를 신라에 바치자 적군들에게 치욕스러움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며 꽃이 떨어지듯 삼천궁녀가 스스로 몸을 던져 산화했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 아닌가. 이 이야기가 의자왕을,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같이 향락만 일삼다 마침내 나라를 빼앗겨 버린 나쁜 군주로 낙인찍히게 만든 대목이다.

 

낙화암의 전설에 대해 오래전부터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때 절벽에서 강으로 몸을 날린 궁녀가 과연 삼천 명이었을까 하는 의아심이다. 실제로 그 역사의 현장에 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 보니, 낙화암은 어림짐작으로도 그처럼 많은 궁녀가 한꺼번에 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이 전혀 되어 보이지 않는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의자왕 편에 따르면, 멸망 당시 백제의 가구 수는 76만 호戶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호당 가족을 보통 네댓 명, 많아야 일곱 명 정도로 잡았을 때 당시 백제의 인구는 대략 삼백여 만 명에서 오백여 만 명이었다는 추산이 가능하다. 그중 남자와 노약자를 제하고 나면 성인 여자는 겨우 백만 명 내지 백오십만 명 가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한 크기를 지닌 나라에 궁녀 수가 삼천 명이라는 것은 애당초 가당찮은 이야기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런가 하면, 현재 충남 부여에 남아 있는 백제 왕궁터의 넓이를 놓고 따져보아도 삼천 명의 궁녀를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규모이다. 게다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계백 장군의 군사가 오천 결사대였음을 감안해 보더라도, 삼천궁녀라는 소리는 가당찮은 숫자임을 충분히 짐작할 만한 일 아닌가. 이로 미루어 살피면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는 추론이 얼마든지 설득력을 갖게 된다. 

 

지난날 동양에서는 ‘삼천’이라는 숫자를 꼭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막연히 많은 수라는 사실을 과장하거나 혹은 상징해서 말할 때 쓰는 표현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러한 용례는 여러 경우에서 두루 발견된다. 

 

일감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한반도의 북쪽 끝인 함경북도 온성 풍서리에서 남쪽 끝인 전라남도 해남 땅끝마을까지의 실제 거리는 정확하게 삼천 리가 못 된다. 그렇다면 이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국토의 길이에 대하여 느끼는 우리 겨레의 심정적 거리인 셈이다. 결국, 우리 조상들은 아마도 나라의 전체 길이를 실제 거리보다 더 먼 삼천 리里 쯤으로 넉넉하게 생각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성싶다.

 

불가佛家에서도 ‘삼천대천세계’라는 말을 많이 쓴다. 태양계와 같은, 생명이 사는 세계가 천 개 모이면 ‘소천세계’라 일컫고, 소천세계가 천 개 모이면 ‘중천세계’라고 부른다. 중천세계가 다시 천 개 모이면 ‘대천세계’라 이르고, 이를 다른 말로 삼천대천세계라고 한다. 따라서 삼천대천세계는 꼭 삼천 개의 세계가 아니라 온 우주를 통틀어 가리키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대륙적인 기질을 지녀서일까, 중국인들은 과장이 상당히 심한 민족인 것 같다. 그들의 허풍은 상상을 초월한다. 삼천갑자 동방삭東方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십 년이 한 갑자이니, 글자 그대로 해석을 하자면, 한 갑자가 60년이니 동방삭이 삼천갑자, 곧 삼천의 예순 배인 일만 팔천 년을 살았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장수한다고 해도 백 년을 채 채우기가 어려운 것이 사람의 수명이거늘, 일만 팔천 년이나 살았다면 과장도 이만저만한 과장이 아닐 수 없다. 

 

비단 동방삭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학작품에서도 ‘많다’ 혹은 ‘크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삼천이라는 숫자를 즐겨 쓰고 있음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시선이라 불리는 이태백과 당나라 때의 대문장가였던 백낙천의 시구절을 보면 그 확연한 증거가 나타난다. 

 

이태백은「망여산폭포望廬山瀑布」에서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이라고 읊었고, 백낙천도「장한가長恨歌」에서 ‘후궁가려삼천인後宮佳麗三千人 삼천총애재일신三千寵愛在一身’이라고 노래했다. 비류직하삼천척, 곧이곧대로 풀이를 하자면 ‘날아 떨어지는 폭포가 삼천 자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여산폭포의 실제 높이가 약 일백여 미터 남짓이라고 하니, 삼천 자나 된다는 표현은 문학적인 정감을 살리기 위하여 과장해서 그리는 한시 기법의 하나일 터이다. 

 

백낙천의 시구 역시 막연히 많은 숫자를 부풀려 나타내는 관습적인 표현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중국 역사서에서 수많은 궁녀를 지칭할 때 통용하여 쓰던 표현이 삼천궁녀라는 말도 있다. 

 

이러한 여러 전고典故들로 미루어 볼 때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 또한 실제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수사임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그것은 꼭 삼천 명이 아니라 막연히 많은 수를 가리킬 때 쓰는 옛사람들의 관습적인 표현법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한 해석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지금껏 의자왕에게 낙인찍힌 주홍글씨를 이제는 지워 주어야 할 명분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가.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이메일 kwak-pogok@hanmail.net

 

작성 2023.04.21 10:17 수정 2023.04.21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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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