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나였노라

이순영

요절한 사람들은 대부분 천재다. 아이러니다. 지금 우리는 반일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히면 빠져나오기 힘들지만, 문학은 다르다. 국경이 있다면 그건 문학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예의를 말한다면 일본이나 저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프리카나 편견을 가질 수 없다. 문학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탐구이며 지성에 대한 신뢰이기 때문이다. 그 시절 침략자도 침략받은 자도 부조리한 경계를 넘어서려고 발버둥 치며 견뎌냈을 것이다. 일본 문학도 일본 문학인들도 그렇게 견디며 시대를 넘어왔다. 고백하자면 나도 일본 문학에 대한 편견이 있었는지 반성해 본다. 음식뿐만 아니라 문사철에 대한 편식은 어리석음만큼이나 경계해야 할 적이다. 그 적을 넘어서야 지성의 꽃을 볼 것이다. 

 

조선 식민지에 대한 일본의 젊은 지식인들은 반제국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인 자신의 나라에 저항하는 사람이 되길 독려하면서 반식민지에 대항한 글을 신문에 기고해서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천황 암살을 추진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고토쿠 슈스이를 보며 분노했다. 안중근이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자신은 조선인을 미워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이 엄혹한 시대에 일본의 젊은 지성인은 자신의 작품 안에 속죄의 마음을 털어놓으며 문학이라는 도구로 정복자들에게 일침을 가했다. 

 

누군가는 먹고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명예를 위해 글을 쓰고 또 누군가는 운명이려니 하며 글을 쓴다. 너나 할 것 없이 그렇다. 26살에 요절한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우리로 보자면 침략 국가의 시인이다. 정복자들의 세상에서 시인은 식민지로 만든 조선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감싸 안은 시인이었다. 반제국주의자의 문학은 삶의 회한이 슬픔으로 녹아있고, 냉소적이며 복잡다단한 감정들에 충실한 문학 세계를 남겼다. 그가 살았던 메이지 시대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파괴자들의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대의 문학은 바다 밑에서 머리만 내밀고 헐떡이는 사자의 심장을 닮아있다. 

 

내가 이시카와 다쿠보쿠에게 관심을 가진 건 시인 백석 때문이었다. 백석은 자신의 이름인 백기행을 두고 백석이라는 아호를 만들었는데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사랑한 나머지 그의 이름 중에서 石을 따와 평생 필명으로 썼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한자로 해석하면 石川啄木(석천탁목)이 된다. 누군가를 흠모하는 건 그의 전 생애를 흠모하는 것이고 그의 영혼까지 흠모하는 것이다. 특히 우울하고 괴롭게 고통스러워 마음 둘 곳 없던 식민지 시절의 지식인들은 문학으로 철학으로 정서적으로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대상이 침략자의 시인이라 해도 망설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스무 살에 첫 시집 ‘동경’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지만, 시집은 상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대신에 천재 시인이라는 극찬을 받았다. 문학인으로 성공하고 싶어 소설도 썼지만, 그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지독한 가난의 고뇌와 싸우면서 절망을 노래하는 건 사찰 주지였던 아버지 때문이기도 했다. 일본의 대처승은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이지만 금전적인 문제로 사찰 주지에서 쫓겨난 아버지로 인해 가난이라는 늪에 빠져든 빈곤자가 되어야 했다. 그의 시 ‘나였노라’는 젊은 시인의 고뇌가 고스란히 녹아내려 강물처럼 흐르고 있는 시다. 세상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지 않기 위하여 발버둥 치는 시인의 흔적이 역력하게 보인다. 

 

희미하게 한밤중 감도는 종소리

생명은 깊숙한 환상, ―‘나’였노라.

‘나’야말로 진정 닿아도 닿기 힘든

흘러가는 환상. 그러니 사람들아, 말하라

시간에서 시간으로 흔적 없는 물거품이라고.

아아 그래, 물거품 한 번 떠오르면

시간이 있고, 시작이 있고, 또한 끝이 있는 법.

순식간에 사라졌구나. ―어디로? 그건 모르지,

흔적 없는 흔적은 흘러서, 사람들은 모르지.

 

나도 그랬다. 나야말로 닿아도 닿기 힘든 흘러가는 환상 속에서 방황했다. 진리는 멸망했고 나는 구원의 무기를 잃었다. 내 젊은 날도 지독하게 고통이라는 이름의 조미료에 중독되어 헤어 나오지 못했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가 와 닿았다. 이 지독한 결핍이라는 스승에게 매달리며 불행한 짐승으로 살았다. 순식간에 사라져가는 시간은 나를 업고 덜컹 인생의 반을 훨씬 넘어와 버렸다. 그래도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를 읽고 인생을 읽으며 내 젊은 날은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스스로 위로한다. 자살하려고 동해바다에 간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하얀 모래밭에서 작은 게들이 꼬물꼬물 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자살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왔다고 한다. 그가 쓴 ‘게에게’라는 시는 지금도 누군가에겐 힘이 되고 희망이 될 것이다. 

 

삶에 있어 한번은 쨍하고 해 뜰 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통으로 점철된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인생에도 쨍하고 해가 뜬 건 ‘단카’때문이었다. 귀족들이 즐기던 폐쇄적인 문학이었던 단카를 일상의 솔직한 감정을 도입해서 쉽고 재밌게 쓴 단카가 혁신적이고 평가를 받으며 크게 성공한다. 젊은 시인, 궁핍을 목구멍에 매달고 살았던 시인, 폐결핵에 걸린 시인, 그 시인은 결국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도 그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아내도 그 이듬해에 남편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불행의 쓰나미가 몰아쳐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가족은 전멸당했지만, 문학으로 그는 부활해서 우리에게 그 시절의 아픔과 절망과 희망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생명은 깊숙한 환상

‘나’였노라.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4.27 11:09 수정 2023.04.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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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