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책을 나섰다. 들꽃들이 각양각색, 저마다의 의미와 형태로 지천으로 피었다. 너무 화려하거나, 너무 짙은 향기로 혼자 돋보이는 법 없이 하나같이 부드럽고 조화롭다. 원색의 유화보다 은은한 수채화에 더 가깝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숨겨진 속내의 품위가 느껴진다. 단순하면서도 분명하고, 수수하면서도 선명하다.
젊었을 때는 겉멋에 더 익숙했다. 장미처럼 강렬한 색깔과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더 매혹적이었다. 조용한 것보다는 화끈하고, 평범한 것보다는 특별하고, 모범적인 것보다는 반항적인 기질이 오히려 멋져 보이고 부러웠다. 자연히 유행이나 명품, 말투, 외모, 호탕하고 영웅적인 외적인 요소에 관심을 보였다. 정작 나의 성향이나 본질과는 관계없는 일들이었다.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었다. 멋있게 보이고 싶고, 누구에게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싶었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보다 가볍게 눈에 띄는 겉치레에 더욱 눈독을 들였다. 헛꽃을 피워서라도 벌 나비를 부르고, 나뭇가지에 걸릴지라도 크고 웅장한 뿔을 길러 용맹을 과시해야만 했다. 소양이나 교양은 지루하기만 할 뿐이지 인기나 유명세와는 별 관계가 없어 보였다.
체면이나 허세, 그것이 문제였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내용보다는 형식이 중요했고, 음식 맛보다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더 마음에 들었다. 비교와 경쟁에 매몰된 삶은 나의 능력,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무리수를 두게 마련이었다. 나만의 매력, 나 자신의 실체를 발견할 기회도 없어서 진정한 자유로움과 편안함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껍데기는 모두 헛것이다.’라는 어느 스님의 말이 있다. 가짜 도자기는 금방 질리지만 진짜 도자기는 보면 볼수록 그 미적 감각에 빠져든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한두 겹 벗으면 금방 실체가 드러나고 마는, 겉멋으로 포장된 사람은 금방 싫증이 나게 마련이다. 화려한 언변과 명품의 옷도 진실한 마음보다 못한 법이다. 겉멋에 팔려 거짓을 진실로 보거나, 사기꾼의 감언이설에 현혹되고 달콤한 유혹의 수렁에 빠진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오래된 친구가 몇몇 있다. 사람이 그리울 때는 문득문득 떠오르는 친구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순하면서도 선하고, 예의 바르고 겸손하다.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한결같으면서도 어제 만난 것처럼 새로운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다. 말수는 적지만 생각이 깊고, 목소리는 작지만 행동거지가 늠름하다. 생색내거나 내세우지 않아도 믿음직스럽고, 꾸미거나 떠벌리지 않아도 신뢰감이 든다. 내 일에 간섭하거나 참견하려 드는 일이 없어도 왠지 든든한 뒷배 같은 느낌을 주는 친구들이다.
속멋은 말 그대로 ‘속에서 우러나오는 멋’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처럼 자기 내면이 겉으로 드러난 인물화다. 냄새나 소리에 민감한 코나 귀보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눈과 마음에 방점을 둔 가치 기준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멋이고, 힘으로 뺏을 수 없는 매력이다. 냄새 아닌 향기이며, 머리 아닌 영혼이다.
그들은 ‘뒤끝이 없다.’거나, ‘화통한 사람이야! ’라는 말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고, 말만 앞세워 허풍을 떠는 일도 없다. 나이나 신분, 외모, 학벌, 재산처럼 외적 조건을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다. 함부로 성내거나 주장하지 않으며, 이해관계에 따라 흔들리거나 돌아서지도 않는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기주의자도 아니고, 어려운 사람은 외면하고 나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에게만 잘하는 기회주의자도 아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때로 힘든 시간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추락해 깊은 절망감에 몸을 떨었던 날들, 서러움이 유령처럼 떠다니던 열등하고 볼품없는 시절이었다. 힘과 용기를 실어준 사람은 밥과 술을 사주고, 신의 한 수 같은 조언을 해주고, 연민의 표정으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넌 최고야!” 한마디 말이라도 진심으로 칭찬과 격려를 보내 주고, 건너야 할 개울물에 징검돌 하나 되어주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쓴 사람이었다.
배려와 사랑, 진실한 마음이 속멋의 향기를 품는다. 자연의 세계가 그러하듯 꾸미지 않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동안보다 동심, 눈빛 속에 따뜻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다. 의리와 정의감이 있어 사회적인 규칙과 도덕적인 규율에 스스로 더 엄격한 인격체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의식이 몸에 밴 교양인이다. 겉으로 드러난 과시(誇示)보다 속으로 마음을 헤아리는 찰시(察視)의 인간미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삶을 빛나게 해줄 한마디 말이 준비된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질투와 욕심, 오해와 불만으로 가득한 서로의 담을 허물고 너와 나의 경계심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얻고 싶다. 오만과 자만에서 벗어나 장자처럼 오상아(吾喪我), 허상인 나를 죽이고 자의식을 버리면 가능한 일이 될까.
늦은 오후다. 특별한 날들보다 일상적인 하루 속에서 행복의 의미를 찾는 나이가 되었다. 화통한 것보다는 반듯하고, 유별난 것보다는 평탄하고, 성공한 사람보다는 순진한 사람이 더 눈에 보인다. 말하기보다 책 읽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 젊어 보이려는 욕심보다 웃는 잔주름이 더 예쁜 사람, 자존심보다 자존감으로 삶에 당당한 사람들이 더 멋있게 보인다. 그런 속멋 있는 친구라면 목마른 그리움에 밤을 새워도 아깝지 않겠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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