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북한산 영봉 신록예찬

여계봉 선임기자

 

꽃이 진 자리에 신록이 움텄다. 불과 며칠 전까지 현란한 축제를 벌였던 숲속에 푸르름이 짙어 온다. 한참이나 우리 눈길을 머물게 했던 색의 향연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대신 담백한 연둣빛 세상이 우리를 반긴다.

 

5월의 산들은 빛을 응집시켜 둔 것 같은 영롱함을 머금고 있다. 푸르름을 만끽하며 산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초목들이 내뿜는 싱그러운 기운은 머리까지 맑게 해 준다. 5월의 첫날 북한산 우이역에서 산 친구들을 만나 북한산 영봉을 향해 출발한다. 물소리조차 청량한 우이천을 따라 올라가다가 하천을 건너 하루재로 오르는 숲길로 들어선다. 

 

꽃이 진 자리에 연둣빛 신록이 움텄다. 

 

숲속에서는 금방 길 위에 혼자가 된다. 소리라고는 숲이 내는 소리와 일행들 발자국소리 뿐. 보물같이 숨어 있는 길섶의 작은 꽃들 사이로 풀냄새를 실은 바람도 느끼면서 산길을 유유자적 걷다 보면 세속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이 주위의 신록과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말끔히 헹구어지는 기분이다. 깨닫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을 돌아보는데 더없이 좋은 수련이 바로 산행이다.

 

백운대와 영봉으로 갈라지는 하루재

 

 

하루재에서 영봉을 오르는 길은 솔바람 소리와 솔방울이 함께 뒹구는 가파른 오솔길이다. 급 경사길을 헐떡이며 오르는 우리 일행을 내려다보며 영봉이 웃고 있다. 몸이 고단하면 때로는 영혼이 맑아진다. 고개를 내민 여린 신록의 나뭇잎들이 계절의 여왕인 5월을 축복하고 있다. 

 

거친 숨결을 토해내야 영봉에 올라선다.

 

북한산 영봉은 영혼 '영(靈)'자를 쓴다. 인수봉이 잘 보이는 이곳에 북한산 등반 중 숨진 산악인들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워 그들의 넋을 달랜 의미에서 '영봉'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2000년 말까지 육모정 고개에는 한국산악회 초대회장을 하셨던 노산 이은상 선생이 쓴 추모비가 있었다. 봉우리 곳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애틋한 사연들이 많았고 산행을 하면서 자식을 먼저 떠난 보낸 아버지를 만나 가슴에 묻은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이제 영봉에는 추모비가 없다. 2008년 모두 철거해 근처 무당골에 모았다. 그들은 생전의 희로애락을 모두 내려놓고 이제 산이 되었다.

 

영봉에 서면 인수봉이 거대한 백악(白岳)을 자랑하며 갑자기 다가선다.

 

영봉에서 삼각산(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보며 모두 자연의 웅장함에 잠시 넋을 잃는다. 영봉은 삼각산의 자태를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고 특히 산악인들의 성지 인수봉을 가장 정면에서 볼 수 있는 봉우리다. 인수봉은 억겁의 세월, 숱한 생명이 나고 지고를 반복할 때도 멈춰 있는 거대한 아름다움이다. 한낮의 햇살이 북한산의 고산준령을 비추니 인수봉을 정점으로 백운대, 만경대, 용암봉과 그 겹겹의 능선이 살아 움직이고 만경대를 정점으로 북한산 주 능선이 왼쪽으로 이어지면서 수십 개의 지능선이 산 아래로 내려가 도시 틈으로 사라진다. 

 

산정에 스치는 한 자락의 바람이 가슴속 옹달샘에 기쁨을 샘솟게 한다.

 

산 아래 도선사에서 스님의 독경과 목탁 소리가 들려온다. 이곳 영봉에 잠든 산악인들의 영혼은 인수봉과 함께 도선사에서 크게 위무를 받는다. 영봉에서 내려와 육모정으로 가는 저 잘생긴 능선 실루엣은 언제봐도 가슴 설렌다. 정면으로 신록에 잠긴 상장능선, 그 뒤로 도봉산의 우이암과 오봉, 오른쪽으로 시선을 이어가면 주봉, 신선대, 자운봉, 만장봉이 도봉산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상장능선과 도봉산 오봉, 자운봉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북서울 시내와 그 너머 수락산과 불암산

 

육모정으로 가는 다소 거친 바위 능선길에 솔바람이 분다. 솔바람은 귀만 맑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저잣거리에서 묻혀온 심신의 먼지까지 깨끗이 씻어내어 산 아래로 날려 보낸다. 편안한 숲길로 들어서니 시선이 닿는 곳마다 5월의 신록이 꽃처럼 눈길을 잡는다. 신록은 꽃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담백하여 혼이 스며 있는 빛깔이다.

 

용암사 법당에 핀 금낭화

 

‘짧은 동안의 신록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참으로 비할 데가 없다. 초록이 비록 소박하고 겸허한 빛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때의 초록은 그의 아름다움에 있어, 어떤 색채에도 뒤서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했던 이양하 선생의 ‘신록예찬’ 한 구절을 떠올리며 산길을 내려온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이메일 :yeogb@naver.com

 

작성 2023.05.03 10:47 수정 2023.05.03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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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