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하필 잘생겨서 더 외롭고 고독했다. 그는 종로 거리를 걸으면 누구나 힐긋 돌아보는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다. 결벽증이 심한 멋쟁이며 지성인인 그는 모던보이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식민지,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인 부조리한 나라다. 인간들이 만든 폭력 앞에서 그의 무기는 독백 같은 ‘시’뿐이었다. 살아서 웃을 수 없는 시대의 부랑아처럼 그의 영혼은 떠돌았지만 두려움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다. 그는 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없었다. 다만 별들의 위치에 시의 이름으로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그의 시는 식민지 지성인들의 별이 되고 희망이 되고 의미가 되었다.
나는 그의 우울을 이해한다. 그의 사랑도 이해하고 그의 시도 이해한다. 그의 전부를 이해한다. 종로 바닥에서 문학으로 젊음을 소비하던 그 시절의 그를 이해하지 않을 마땅한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잘생긴 외모는 그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을지 모른다. 문학이 그에게로 와서 철학이 되고 자유의지가 되고 종국에는 절망이 되었지만 나는 그에게 간 문학도 사랑하고 철학도 사랑하고 절망도 사랑하게 되었다. 그에게서 가서 시가 된 ‘여승’도 나는 속절없이 사랑하고 말았다.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별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이유도 모르는 채 떠난 남편을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여승이 된 여인을 그는 자신의 시 속으로 끌어와 위로해 주고 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어린아이의 엄마인 여인은 얼마나 서럽고 슬픈 삶을 살아야 했을까.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영영 떠나버린 아이는 돌무덤이 되었으니 그 한 많은 삶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건 머리 깎고 중이 되는 일이었을까.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라는 그의 독백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불경처럼 서러워졌다니 얼마나 서러워야 불경처럼 서러워질 수 있을까. 머리 깎고 중이 되어야 했던 여인은 쓸쓸한 낯이 옛날 같이 늙어서 더 애잔했을 그의 연민을 나는 연민한다.
금광촌 주변 시장에서 봤던 옥수수를 파는 파리한 여인을 안쓰럽게 보았는데 어느 해 산절 마당에서 여승이 된 여인과 마주쳤던 그의 고뇌를 나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여인은 세상에서 살 수가 없어 머리 깎고 여승이 되었지만, 종교로도 넘어설 수 없는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그는 보았을 것이다. 인간은 운명에서 달아날 수 없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여인을 보며 확인했을까. 재빨리 도망칠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고 한 들뢰즈의 말이 맞는 것인지 그도 어지러웠을 것이다.
나라도 바람 앞의 촛불인데 한 여인의 운명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처절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여승’의 시를 쓰며 그는 여인의 지옥을 봤을 것이다. 그 지옥으로부터 여인을 구해내지 못한 시대를 원망했을 것이다. 나약한 식민지 백성이 지니는 설움은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두워질수록 더욱 깊어가는 삶에 대한 통찰은 문학으로 펼쳐지고 참혹한 지성의 무게를 짊어진 그는 시의 세계로 한발 한발 나아갔다. 고향의 언어를 시의 동반자로 삼아 섬세하고 아름답게 구현해낸 그를 나는 사랑했다.
그가 바로 백석이다.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백석’인 것이다. 1934년 조선일보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어사범과를 수석으로 졸업한다. 영어, 러시아어, 독일어, 중국어에 능통했지만 정작 일본에 유학했으면서도 일본어를 제일 못했다. 그는 귀국해서 장학금을 줬던 조선일보에 기자가 된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백기행이지만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사모해서 백석이라는 필명으로 더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유명한 자야의 애인인 백석이며, 첫 시집 ‘사슴’이 너무 좋아 어렵게 구해서 필사한 윤동주가 존경했던 백석이며,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의 노천명이 사랑한 백석이다.
어느 날 문득 시 백 편을 써서 오겠다며 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그러나 육이오가 터지자 서울로 돌아오지 못하고 고향 정주에 머물렀다. 얼떨결에 월북 시인이 된 백석은 ‘사상과 함께 문학적 요소도 중요시하자’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김일성은 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시인을 두메산골 양강도 삼수갑산으로 추방한다. 이념의 희생자인 백석은 북한 문단에서 버림받고 남한 문단에서도 버림받았다. 남과 북에서 모두 잊혀진 사람이 되었지만, 지금은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되어 찬란하게 부활했다. 그는 말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