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 5월 어느 날.
나는 일본해운회사에 취업이 되어 도쿄에 첫발을 디뎠다. 나의 시선에 들어온 도쿄는 그야말로 환상의 도시 그 자체였다. 1964년에 이미 도쿄올림픽을 개최했던 도시인지라 잘 정돈된 도로와 도시 구조는 세련되어 있었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갖고 있었으며 부두 근로자들도 출퇴근을 자가용으로 했다. 25살의 청년이었던 나는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일본이 대단한 나라로 각인되고 있었다.
그 당시 경제학자도 아닌 나의 시선으로 비춰진 일본은 강했다. 미국 다음으로 경제규모가 큰 세계 2위의 경제대국 일본은 우리나라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큰 산으로 보였다.
자동차, 전자제품, 철강, 선박 등 일본의 수출 주력상품들을 전 세계로 실어 나르는 선박이 부족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는 ‘Made in Japan’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호황 속에는 누구도 예측 못한 일본의 경제몰락이 숨어 있었다.
이른바‘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이라 불리는 1990년대 말 버블경제의 붕괴와 더불어 세계적인 경기 불황은 일본이라고 비켜 갈 수 없었고 한국과 중국이라는 만만찮은 경쟁자가 나타났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북아 3국이 경제 경쟁을 해야만 했다.
일본의 조선소를 대표하던 미쯔비시조선소와 히타치 조선소가 문을 닫을 정도로 건조 규모를 줄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본이 한 수 아래로 봤던 대한민국의 현대 삼성 대우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특히 석유시추선 분야에서 일본은 기술력 부족으로 시작도 하지 못한 채 한국의 건조능력을 부러운 눈짓으로 보아야만 했다. 연료 절감을 위한 컨테이너 운반선의 선형 구조에 독보적인 능력을 갖춘 우리나라에게 세계 조선 1위의 자리를 내주고 말았다.
이에 따르는 대형 선박 엔진 제작 능력도 한국에게 1위의 자리를 넘겼다. 아울러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대형 선박 엔진을 제작하는 나라가 되었다.
1960년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세계정세는 냉전과 이데올로기의 흐름이 팽배해 있었다. 우리나라는 6·25전쟁은 종전이 아니고 휴전상태에 있기에 전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중국은 마오쩌둥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공산화 정부를 건설하여 지도자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사회주의 틀 안에 인민을 가둬 놓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2차 대전 패배 이후 중립국을 내세우며 이념과 체제는 상관 않고 돈이 되는 나라와는 무역 거래했다. 세계적으로‘경제동물’이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돈벌이에 매진했다. 그 당시에는‘Made in Korea’도 없었고‘Made in China’도 없었다. 다만‘Made in Japan’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한국이 선박은 이미 일본을 추월했고 전자제품을 비롯해 석유화학제품 등에서 막강한 기술력으로 일본 기업들의 문을 닫게 했다. 중국은‘죽의 장막’을 걷어내고 값싼 노동력과 다양한 제품에서 일본을 무너뜨리고 한국까지 위협하고 있다.
43년 전 내가 25살 청년이었을 때 일본의 도쿄는 화려함, 부강함 그리고 막강함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일본 도쿄에 갔을 때 일본은 녹슬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미래도 남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일본주日本酒 한 잔을 비웠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