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에서도 자장磁場 같은 염력이 생겨나는가 보다. 산길의 돌멩이가 하나 둘 쌓이고 쌓이면 결국엔 탑이 되듯이, 비록 하찮게 여겨지는 말일지라도 거듭거듭 되뇌다 보면 마침내 주문呪文이 된다.
주문이라고 해서 모두가 똑같은 주문은 아니다. 주문도 어디까지나 주문 나름이다. 좋은 말은 만 번을 되풀이 하면 기도의 주문이 되지만, 나쁜 말은 만 번을 되풀이 하면 저주의 주문이 된다.
혹여 ‘팔공산 갓바위’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신지 모르겠다. 갓바위가 영험이 많기로 명성이 자자한 기도처임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단 한 차례만이라도 그곳에 올라 본 일이 있는 분들이라면, 올라서 지심至心으로 “약사여래불”을 염송한 경험을 지닌 분들이라면 누구든 한결같이 묵시적 동의를 하지 싶다, 이 갓바위가 톡톡히 이름값을 한다는 사실을. 거기 약사여래부처님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리면, 틀림없이 한 가지씩의 소원은 이루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갓바위로 향하는 산길은 여느 기도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높고도 가파르다. 수직 솟구친 암벽 사이사이로 사다리같이 놓여 있는 수천 단의 돌층계가 젊은 사람들조차 후유 한숨부터 내쉬게 만든다. 그 험난한 비탈길을 따라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어오르며 쉴 새 없이 “약사여래불, 약사여래불……”을 염송하는 꼬부랑 할머니의 기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숙연한 마음이 된다. 무슨 비원悲願을 간직하고 있기에 저리도 절절히 부처님 명호를 불러댈까.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지극한 신심에 돌부처인들 어찌 감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살아가다 보노라면, 이따금 ‘꼭지’니 ‘남득男得’이니 혹은 ‘필녀畢女’니 하는 등속의 이름을 가진 여성들을 만나곤 한다. 남아선호사상이 절대의 가치로 지배하던 지난 시절,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여인에게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자無子가 천형처럼 무거운 생의 짐이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예의 그 이름들에는 ‘꼭 아들을 점지해 달라’, ‘남자아이를 얻게 해 주십사’, ‘여자아이는 이제 그만’ 하는 우리 여인네들의 간절한 염원이 투영되어 있다.
세상의 수다한 말들 가운데 이름만큼 자주 불리는 것이 또 있을까. “꼭지야, 꼭지야”, “남득아, 남득아”, “필녀야, 필녀야”, 이렇게 천 번 만 번 되풀이하여 부르다 보면, 그것이 하나의 주문이 되고 거기에 염력이 걸려서 마침내 소망이 현실로 나타날 것임을 굳게굳게 믿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어쭙잖은 사연이지만 우리 집 이야기를 한번 해 볼까 한다. 집의 큰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름을 있을 재在자와 행복할 행幸자를 써서 ‘재행’이라고 지었다. 그래 놓고는 녀석이 갓난아기였을 적부터 나는 무슨 주문이라도 외듯 “착한 재행이, 착한 재행이” 하며 이름 앞에다 꾸밈말 하나를 붙여서 불러 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두 달 석 달 되풀이된 것이 지금껏 근 이십 년 가까이를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착한~ 재행이, 착한~ 재행이” 하면서 마치 무슨 노래처럼 제법 가락까지 잡혔다.
애당초 피그말리온 효과 같은 목적을 노리고서 그리 한 것은 물론 아니다. 단지 그냥 이름만 부르려니 뭔가 허전한 듯싶어 성 대신 넣어 불러 본 것일 뿐이다. 경위야 어찌 되었건 녀석이 그다지 큰 말썽 한 번 부리지 않고 무던하게 자라 주었으니, 생각하면 고맙고 기특하기 그지없다.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노래 삼아 불러준 이름 앞의 그 꾸밈말이 하나의 기도가 된 덕이라 믿고 싶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사람은 누구 없이 세상에 올 때부터 입속에다 도끼를 지니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도끼가 남의 가슴을 찍게 되면, 그것이 도리어 자신을 찍게 된다는 것이다. 손으로 찍는 도끼는 세월이 지나면 결국엔 그 상처가 아물겠지만, 혀로 찍는 도끼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끝내 그 상처가 아물지를 않는다. 그리고 또 좋은 말은 대개 그 한 번으로 그치고 말아도, 나쁜 말은 결코 그 한 번으로 그치지를 않는다. 단 한 번의 나쁜 말이, 만 번의 가슴을 후벼 파는 송곳이 되어 거듭거듭 상처를 덧낸다. 잘못 내뱉어진 말은 그만큼 무섭고 살스러운 것이다.
어찌 말에 한하겠는가. 마음의 작용으로 빚어지는 삿된 기운은 비상砒霜보다 치명적이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 염천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그것은 가슴에 맺히는 응어리다. 그래서 한을 품고 죽은 이들은 원귀가 되어 구천九泉을 떠돌며 산 사람을 괴롭힌다. 뱀의 혀에서 독이 뿜어져 나오듯 한을 품은 가슴에선 독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 독기는 곧 저주가 되어 살煞이 맺힌 이에게 앙갚음을 하려 든다.
저주는 메아리의 속성을 지녔다. 자신이 남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면, 그 저주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와 끝내는 자신마저 망가뜨린다. 조선 후기 궁정문학인『인현왕후전』은 이 저주가 어떠한 상황으로 귀결지어지는가를 실감나게 그려 놓았다. 숙종을 향한 사랑에 눈이 멀어 연적戀敵이었던 인현왕후에게 저주의 독화살을 쏘아 댄 장희빈, 그로 인해 인현왕후는 원인 불상의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하지만 그 저주가 마침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와 장희빈 역시 사약을 받고서 참혹한 최후를 맞지 않았던가. 이것이 저주의 얼굴이요 저주의 속성인 것이다.
좋은 말만 골라서 쓰고, 좋은 생각만 골라서 하도록 노력하며 살고 싶다. 좋은 말과 좋은 생각만 하고 살아도 오히려 부족한 것이 우리네 인생이거늘 굳이 나쁜 말, 나쁜 생각으로 구업口業을 짓고 의업意業을 만들 일이 뭐 있을까 보냐.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