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함’의 다른 말은 ‘살아있음’이다. 살아있다는 건 변한다는 것이다. 변한다는 건 시간이 지나가며 내는 행진의 북소리다. 이 세상은 잠시 삶이라는 변화를 느끼다가 다시 무한한 변화로 돌아가는 것인지 모른다. 그 짧은 삶이라는 변화 속에서 지리멸렬하게 사는 게 또한 인생 아니던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천년이나 살 것처럼, 아귀다툼이다. 인생은 하루도 똑같은 날이 없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고, 한 시간 전이 다르고 일 분 전이 다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삶 속에서 어떤 거대한 목적이나 의미를 갖고 사는 사람은 드물다. 엄밀히 말하면 삶은 생존이다.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지구에서 뛰어내리지 않고 끝까지 생존하는 것이 삶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인생에게 때론 무심하고 때론 열정적이다. 이 치열한 생존게임에서 이기는 건 시간밖에 없다. 우리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기지 못한다. 우주적 시간의 광대함에 비하면 인간의 시간은 찰나에 불과한 보잘것없지만 인간 안에도 광대무변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 우주적 시간의 광대함에 비해 우리는 보잘것없이 작지만, 시간은 인간을 위해 모든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조절해 준다. 시간은 인간이 재는 것이 아니라 시계가 잴 뿐이다. 시간은 결집과 분산의 반복이다.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 모이는 우주의 원리에 따라 단 한 번도 같은 자리에 멈춘 적이 없다. 그 시간의 흐름을 잘 알고 있던 백거이는 ‘술을 마시며’라는 시에서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냐고 나무라고 있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불꽃처럼 순간의 삶이거늘
풍족한 대로 부족한 대로 즐겁게 살지니
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
좋은 일이 있든 나쁜 일이 있든 사람들은 모두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란 아등바등 살아가면서 알량한 재주를 뽐내며 네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하면서 살아가는 싸움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시간이란 짧디짧은 부싯돌의 불꽃 같은 순간인데 달팽이 뿔 같은 그 좁은 공간에서 다투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이라고 백거이는 일갈한다. 우리는 알면서도 다투고 알면서도 성내고 알면서도 욕심부린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풍족하면 좀 나누고 부족하면 덜 쓰고 하면서 즐겁게 살아야 마땅한데 그게 잘 안된다.
하하 웃지 않는 사람은 바보라고 백거이는 말했지만, 대부분 사람은 오늘도 웃을 일 없는 하루를 보낸다. 티비 속의 개그맨이 웃겨 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도 우리는 엔간해서 잘 웃지 않는다. 그저 고단한 하루를 스스로 위로하며 오늘은 주식이 올랐는지 떨어졌는지 확인하거나 술집에 앉아 삼겹살을 목구멍에 욱여넣으며 쓰디쓴 소주 한잔으로 겨우 버틴다. 사는 건 원래 웃음보다 고통이 더 많은 법이다. 그걸 누가 모르겠는가. 모르면 바보다. 백거이는 고통이 더 많다는 걸 인정하면서 웃지 않으면 바보라고 말하고 있다. 부처도 ‘고통은 불가피하지만 괴로워하는 건 선택이다’라고 말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기면 되고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즐기면 그만’이라는 삶에 통달한 이의 고뇌가 느껴진다. 삶에 통달했는데 무슨 고뇌냐고 하지만 백거이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서 웃을 수 있는 한계에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사람들은 희로애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백거이는 중국 당나라 때 허난성에서 가난한 학자 집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이미 시를 짓고 아홉 살 때 시의 음률을 알았다고 한다. 열 살에는 가족을 떠나와 장안에서 교육받고 스물아홉에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고 서른두 살에 황제 친시(親試)에 합격하고 그 무렵에 지은 장안가(長恨歌)는 당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가 된다.
백거이도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다 겪어야 했다. 한림학사가 되고 국가 일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간신들의 달콤한 말에 빠져 사는 현종에게 여러 번 쓴소리하고 무능력한 관리들을 풍자하는 시를 써서 미움을 받게 된다. 이미 권력이라는 마약에 취해 있던 현종은 간신들의 직언에 따라 백거이를 강주로 좌천시킨다. 백거이는 이때 울분을 안고 불후의 명작인 ‘비파행’을 쓰게 된다. 가을이 깊어가는 날 저녁에 우연히 들려오는 비파 소리를 듣고 자신의 처지와 결부시켜 단숨에 지어낸 시가 ‘비파행’이다.
모두들 다시 듣고 가리어 흐느끼는데
그 자리에서 누가 가장 많이 눈물 흘리는가.
강주사마의 푸른 적삼이 축축해졌더라.
백거이도 푸른 적삼이 축축해지도록 울었던 시절이 있었다. 즐거움과 고통과 기쁨과 절망을 극복하고 난 후에 얻어낸 삶은 그래서 더욱 소중한 것이기에 하하 웃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어이없어도 웃고 화나도 웃고 절망해도 웃고 기가 차도 웃는다. 생각해 보면 운다고 상황이 달라지겠는가. 달라질 상황이라면 우리는 통곡도 할 수 있다. 하하하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상황을 극복한 사람이다. 산 위에 올라가 보면 개미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나를 객관화 시켜서 보면 아웅다웅 살아가는 일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를 대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진정한 나를 볼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백거이는 전해주고 있다.
‘하하 웃지 않으면 그대는 바보’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