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구도와 사색과 공존의 길, 지리산 칠암자(七庵子) 순례길

 

스페인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듯이 한국에는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있다. 불교 신자들이 칭하는 순례길이라고 불리는 곳이 우리나라에 세 곳이 있다. 설악산 백담사부터 출발해 영시암, 봉정암, 오세암을 돌아서 다시 백담사로 돌아 나오는 설악산 사암자 길, 오대산 월정사에서 출발해서 오대천을 따라 상원사를 거쳐 적멸보궁까지 올라가는 오대산 선재길, 그리고 지리산 음정 마을에서 출발해서 도솔암부터 3개의 사찰과 4개의 암자를 거처 실상사에서 마무리하는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바로 그곳이다.

 

칠암자 순례길에서 바라본 지리산 마루금

 

그중에서도 신도와 등산객들이 부처님 오신 날에 특정한 암자 구간을 묶어 걷는 순례길이 ′지리산 칠암자길′이다. 이 길은 지리산 마루금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삼정산 자락의 산허리에 점점이 박혀있는 일곱 개 절을 잇는 산길이다. 자세히 말하면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도솔암과 전북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 구간을 잇는 암자길이 그곳이다. 칠암자는 지리산 뱀사골 동쪽에 있는 삼정산(1,225m) 품에 있는 영원사, 삼불사, 실상사 등 3개의 사찰과 도솔암, 상무주암, 문수암, 약수암 4개의 암자를 말하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3사(寺) 4암(庵)이지만, 모두 깊은 산에 숨어 있는 절집 분위기여서 그냥 칠암자라 부른다.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안에서 또 다른 지리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암자와 암자를 잇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천왕봉 등 지리산 주 능선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눈에 담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네이버 지도)

 

함양군 음정마을에서 시작해서 남원군 실상사까지 걷게 되는 칠암자 순례길은 약 17㎞로 8시간 정도 걸리므로 주로 새벽에 음정마을을 출발한다. 첫 번째 들리는 도솔암으로 가는 길은 비법정 탐방로여서 평소에는 갈 수 없고 부처님 오신 날에만 일반인들에게 절집을 개방한다.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아닌 평소의 지리산 순례길은 육암자 길이다. 도솔암을 가기 위해서는 벽소령으로 가는 비포장길을 걷다가 오른쪽 샛길로 된비알을 한참 올라야 한다. 새소리를 벗 삼으며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하고 청정한 숲길을 걷다가 숨이 깔딱 넘어갈 즈음 쭉쭉 뻗은 편백 나무숲 옆에 절집으로 들어가는 사립문이 보이고 암자 뜰에 작디작은 들꽃들이 함초롬하다. 

 

′부처님 오신 날′에만 절집 문을 여는 도솔암(해발 1,165m)

 

′도솔(兜率)′은 불교에서 이상세계를 일컫는다. 그 의미대로 도솔암은 해발 1,200m의 멀고 먼 산꼭대기에서 천왕봉을 비롯한 지리산 마루금이 훤히 바라보이는 이상적인 장소에 자리하고 있다. 절집은 소박하고, 연둣빛 잔디밭에 서 있는 하얀 석탑이 단아하다. 마당 끝에서 지리산 주 능선을 조망하면 누구나 가슴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은 왜 산에 숨는가. 수행이란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려야 하는 절체절명의 고독한 여행이다.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집착의 화살을 뽑아내지 못하는 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것이 선가의 결의다. 그래서 스님들은 승냥이 우는 후미진 산방에서 홀로 머물면서 도를 구한다. 

 

도솔암에서 한 시간쯤 오솔길을 내려내면 영원사(靈源寺)에 다다른다. 법당 앞마당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부처상이 세워져 있는데 부처는 멀리 지리산 주 능선에 있는 벽소령을 바라보고 있다. 영원사는 지리산에 숨어 있는 절이 아니라, 지리산을 앞산으로 삼은 절집이다.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 이름 높은 고승들이 수행했던 유서 깊은 사찰이었고, 1948년 여순사건 때 불태워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10배나 더 큰 대찰이었다.

 

 ′영혼의 뿌리를 찾는′ 영원사(靈源寺, 해발 895m)

 

영원사 공양간을 돌아서면 오르막이 시작된다. 영원사에서 영원령을 넘어 상무주암에 이르는 1.8㎞ 구간 중에 1㎞가 넘는 구간이 오르막길이다. 이후에도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지만 이 구간만 지나면 산길은 오솔길 분위기다. 코를 땅에 박고 오르다 보면 땅에 바짝 붙은 봄꽃들이 슬그머니 꽃술을 내민다. 등산로 곳곳에 소나무 고목과 어우러진 지리산 전망터가 있어 쉬엄쉬엄 걸어간다. 항상 새벽같이 깨어 있으라. 숨찬 고개를 뒤로 꺾어 산 아래를 내려보면 거기에 사바는 없고 출렁출렁 숲의 이랑만 아득하다. 산죽에 옷자락을 스치며 산길을 오르니 상무주암은 산 바깥을 도는 오솔길 안쪽에 슬며시 앉아 있다. 스님은 참선에 들었는가. 텅 빈 듯 고요한 암자의 정오가 미묘하다. 

 

영원사에서 상무주암 가는 길에서 바라본 지리산 반야봉

 

상무주암은 순례길 암자 가운데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 상무주(上無住)란 ‘지극히 깊은 깨달음’이란 뜻으로,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에 있는,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이 2년여를 머물며 은거했는데, ″경치가 그윽하니 천하제일인지라 선객이 거주할 만 했다″는 말을 남겼다고 할 정도로 전망이 빼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법당 마루에 앉아 돌담 너머 멀리 지리산 주 능선을 바라보면 이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리고 탐방객이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은 다른 암자와 달리 상무주암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의 사진도 필자가 과거에 찍어둔 사진을 사용했다. 

 

칠암자 순례길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상무주암(해발 1,162m)

 

상무주암에서 문수암(文殊庵)까지 1㎞는 쉽게 내려서지만, 군데군데 경사가 급하고 물기를 머금은 바위들이 많아 조심해야 한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익어가는 잎사귀들. 산과 들에 뿌리박은 초목들은 저마다 초록을 가득 머금은 채 득의양양하다. 적막한 숲길이 갑갑하다 싶을 즈음, 갑자기 커다란 바위 아래로 제비집처럼 매달려 있는 작은 암자와 함께 탁 트인 전망이 동시에 나타난다. 문수암은 순례길의 풍경을 말할 때 최고로 꼽는 이들이 많은 절집이다.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천여 명이 숨었다고 전해지는 천인굴과 늘 마르지 않는 석간수로 유명하다. 

 

문수암 암자 너머로 지리산 건너 삼봉산이 아득하다.

 

시야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암자가 깃들이지 않을까. 무너지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허름한 나무의자에 앉아 장엄한 백두대간 지리산 마루금과 능선 위로 빨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한참을 눈 호강한다. 큰 바위굴에서 나오는 물 한 모금으로 몸 안의 감동과 몸 밖의 땀을 식힌 후, 암자를 내려선다.

 

문수암(해발 1,060m) 천인굴

 

다시 1㎞, 골목길 같은 산길을 내려서면 산자락의 허리에 자리한 삼불사(三佛寺)다. 삼불사는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법당 위로는 산신각이 보이고 아래도 제법 큰 탑이 있다. 절이 여염집을 닮아 꾸밈과 치레가 없다. 전각의 번다한 치장은 절집의 세속화를 증명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거늘 유한한 물질의 허장성세로 과연 무엇을 도모하려는 것일까. 그저 생긴 대로 있는 대로 살아온 흔적이 서려 있다. 

 

산객들에게 풍경으로 보시하는 최고의 절집은 삼불사가 아닐까 싶다. 여기서는 지리산으로 향한 창문이 활짝 열린 듯하다. 법당 앞에 앉으면 왼쪽으로 지리산 바깥 산들과 마을이, 오른쪽으로 멀리 천왕봉에서 하봉과 추성리로 흘러내리는 능선의 실루엣이 유연하다. 앞산은 새잎들의 연녹색 향연에 빠져있고, 먼 산은 푸르스름한 산색으로 치장하고, 산 사이사이에는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 있다. 

 

비구니 참선도량 삼불사(해발 990m)
삼불사 절 마당에서 바라본 금대산과 법화산

 

삼불사에서 약수암까지 2.3㎞ 내리막길은 너덜지대의 연속이어서 만만치 않지만 내려갈수록 동네 뒷동산 풍경이어서 정겹기만 하다. 맑고 고즈넉한 약수암은 시원한 샘물과 1780년 만들어진 고색창연한 목각 탱화인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보물 421호)으로 유명하다. 일 년 내내 맑고 청정한 약수가 솟아나 이름 붙여진 약수암의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는 것은 칠암자 순례자들의 통과 의례다.

 

약수암((해발 560m) 약수터

 

돌계단 위 보광전(普光殿) 단청은 하염없이 빛바래 나무의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단청 무늬가 어렴풋이 남은 늙은 처마의 질박한 멋이 일품이다. 처마를 이룬 묵은 부재들의 맨살에서 긴긴 시간이 느껴진다. 전각 안에는 부처님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조각한 목조 탱화가 있다. 11분의 옷자락 주름까지 세밀하게 조각하고 금칠을 한 기교와 정성이 놀랍다. 반질반질한 마루에 앉아 한참 동안 탱화를 바라보다가 법당 앞을 내려다보니 한낮의 햇빛이 채소밭에 부서져 내린다.

 

 약수암 보광전의 목조탱화

 

약수암에서 나와 편안한 산책로와 불편한 콘크리트 임도를 걷다가, 논밭과 어우러진 실상사(實相寺)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實相)은 곧 자연(自然) 아닌가? 지리산에 가장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종착지인 실상사는 천왕봉과 마주 하고 대찰로 통일 신라 흥천국사가 창건한 절이다. 평지에 있어 은둔의 느낌은 덜하지만 볼거리는 많다. 경내 극락전 앞의 석등(보물 35호)과 2기의 삼층석탑(보물 37호)을 비롯해 딸린 암자인 백장암의 삼층석탑(국보 10호) 등 문화재가 수두룩하다.

 

실상사(해발 330m) 대웅전 앞의 삼층석탑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걸은 칠암자 순례길을 나를 내려놓는 길이자 나를 채우는 길이다. 지리산의 웅장한 능선을 마주하면서 걷는 동안 내내 나를 가두며 구름처럼 일던 번뇌는 실타래가 풀리듯 사라진다. 지리산 순례길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면서 흘렸을 땀과 그들이 남긴 발자국들, 아름다운 추억과 간절한 기도가 배어 있는 구도와 사색의 길이다. 요즘 절집 입구에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표지판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구도와 사색의 길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지리산과 부처님이 내준 길을 즐기되, 절 안쪽은 스님들의 조용한 기도처로, 길 바깥은 야생동식물들의 안전한 보금자리로 배려하는 공존의 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저녁 공양을 알리는 실상사 소종 소리가 뎅뎅뎅 울린다. 지리의 산자락은 이미 산그늘이 접혀 먹물이 번진 듯하다. 산길을 시작할 때는 까마득하지만 돌아보면 늘 아쉽고 그리워진다. 순례객은 선문 밖 석장승의 배웅을 받으며 산문을 나선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이메일 :yeogb@naver.com

 

작성 2023.05.16 10:19 수정 2023.05.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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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