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용 (수필가/인문학자)
신은 천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닙니다.
신이 천재라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도 아니고, 신이 영웅이라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신은 그저 신일 뿐이다. 그래서 신은 자기를 소개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애굽기 3:14) 신은 자기를 이렇게 소개해도 됩니다. 그는 언제나 ‘나는 나다!’ 하는 식으로만 자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언제나 똑같이 ‘두려워하지 말라’고 요구할 뿐입니다.
신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것은 믿음의 부족 현상으로 이해되었고, 그것은 종교재판에서 심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신은 참으로 놀라운 존재입니다. 생각은 자유이니, 생각의 내용은 무궁무진할 뿐입니다.
키르케고르는 1843년 《유혹자의 일기》를 세상에 내 놓았습니다. 동갑내기 책 《이것이냐 저것이냐》도 이미 출간된 상황입니다. 이것이 철학자의 처녀작이 되면서 그의 존재를 불멸이 되게 했습니다.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며 그는 실존철학의 선구자로 군림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도 생철학의 선구자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아쉽게도 그는 시선을 낭만주의적인 방식으로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 말았습니다. 소위 ‘돌이 별이 되는 철학’을 펼친 것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신학에서 시작하여 인문학으로 나아갑니다. 신을 바라보며 사람을 발견합니다. 신을 공부하며 인간을 이해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형이상학에서 뿌리를 내리지만 거기서부터 그는 인간의 본성을 주시하기 시작합니다.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는 에로스적인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인간만이 에로스적일 수 있습니다. 신에게는 에로스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신을 에로틱하게 그렸다는 말은 신성모독이 될 수 있습니다.
신은 에로틱하지도 않고 에로틱할 수도 없습니다. 신에게는 몸이 중요한 사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현상의 영역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천국에서는 아무런 효용도 얻지 못합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태복음 22:30) 소위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천사가 되고 맙니다. 개체의 속성이었던 개성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몸이 전하는 감각 따위는 천국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면서부터 진리의 문제가 발생하고 맙니다. 두 사람만 모여도 진실이 문제가 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사랑에 빠진 자의 대표적인 질문입니다. ‘진실을 말하라!’ 취조와 심문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가 없습니다.
신은 그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또 그것을 가르치려고 애를 썼지만, 사람은 타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고 맙니다.
다르다! 이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내용입니다. 이 사람 이야기는 저 사람 이야기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한 사람의 견해를 기준으로 삼아 다른 사람을 궁지로 모는 것도 잘못이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 긍지를 갖지 못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긍지는 타인을 향해 욕지거리를 남발하는 것에서 증명되는 것도 아니고, 긍지는 신을 위해 전도의 사명을 띠고 행동하는 데서 증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긍지란 그저 조용하게 퍼지는 부드러운 빛과 같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자기 자신은 타인의 자기 자신과 함께 할 때 사랑이라는 기적이 탄생합니다.
신은 믿음을 원했지만, 사람은 사랑을 원할 뿐입니다. 신도 사랑을 말했지만, 그는 임마누엘의 의미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의미는 무궁무진하지만, 거기엔 육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오로지 육체를 전제합니다. 사람이 있는 곳에 육체가 있습니다. 육체가 있는 곳에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아름다운 현상이 있습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이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한 자입니다. 그는 그것을 기록하며 실존철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