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이순영

삶은 언제나 나를 속인다. 삶이 나를 속이는 건 내 결핍이 만들어 낸 욕망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결핍으로 이루어진 욕망덩어리다. 삶이라는 기차는 그저 갈 뿐인데 나는 삶의 기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자꾸 옆자리를 기웃거린다. 다음 정차역을 바라보며 내려 버릴까 그냥 갈까 망설이면서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목적 없이 간다. 젊은 시절엔 삶은 나를 속이기 위해 달려간다고 생각했다. 조금 나이를 먹고 보니 내가 삶을 속이고 있었다. 삶이 나에게 속으면서도 삶은 그저 가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모른다. 삶이 나를 속이는지 내가 삶을 속이는지 모른다. 때론 삶에게도 속고 때론 나에게도 속는다. 나는 무심한 관찰자적 삶을 아직 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해주겠다는 신의 말이 정확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말을 음미하면 할수록 귀여운 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위로의 말치곤 귀엽고 매력적이다. 남모르게 하는 치열한 노력은 언젠가는 보상받는다는 뻔한 거짓말처럼 그대로 믿고 싶어진다.

 

스무 살 무렵에 내 뒤통수를 갈기고 도망간 삶을 원망한 적도 있었다. 나는 그냥 태어나 사고 한 번 안 치고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이유도 모른 채 느닷없이 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서른 살 무렵엔 개똥밭에 구르며 절망의 구렁텅이를 빠져나오지 못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삶은 나를 속이고 그것도 모자라 등을 밀어 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작정하고 삶을 속였던 사람들은 아무 일 없이 잘만 살고 있었다. 삶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을 바라보는 객관자는 따로 있고 우리는 그 객관자를 위한 배우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도 노여워하지도 말라고 충고한다.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마는 걸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누구나 삶은 그냥 삶이 아니다. 삶에는 서사가 있다. 그 서사를 통해 희로애락과 오욕칠정을 이해해야 한다. 현재는 슬프고 마음은 미래에 살고 모든 것은 순간적이고 또 지나가는 것이라고 푸시킨은 말하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푸시킨처럼 삶과 싸우면서 지리멸렬하게 산 사람도 드물 것이다. 10살에 프랑스어로 자작시를 지었다니 천재라는 칭송이 아깝지 않고 러시아 귀족 자녀들만 다닌다는 리쩨이에서 130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또 15살에는 첫 시집을 냈다. 그런 푸시킨에게 러시아 근대문학을 창시자며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사랑 앞에 장사 없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진리인가 보다. 푸시킨은 러시아 상류층의 여인 나탈리야 니콜라예브나 곤차로바에게 청혼한다. 그런데 이 여인은 18살로 13세 살이나 많은 남자와 결혼했지만 사별했다. 누가 봐도 반할만한 미인이었지만 몰락한 집안으로 아버지가 사위에게 빨대를 꽂기 위해 푸시킨과의 결혼을 성공시킨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바람둥이였다. 그 시절 보기 드문 스캔들 조제기였는데 그중에서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와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사실 푸시킨이 곤차로바의 불륜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었다. 푸시킨은 유부녀부터 귀족 여성, 예술가, 창녀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와 방탕한 생활한 전력이 있으므로 곤차로바의 스캔들에 대해 대 놓고 말하지 못했다. 언젠가 총독 부인과 바람피우다가 총독에게 들켜서 혼쭐이 나기도 했다. 바람만 피운 게 아니라 노름까지 했고 결투광이기도 했다니 인간이 할 수 있는 나쁜 짓은 다 한 셈이다. 서로를 비난할 수 없는 부창부수였다.

 

푸시킨은 곤차로바의 스캔들에 익명의 투서를 받고 프랑스 근위대 장교 조르주 당테스가 스캔들의 상대라는 걸 확신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당테스에게 결투를 신청하게 된다. 그런데 당테스와 처제가 결혼하는 바람에 결투는 없던 일이 되어 버린다. 그러나 곤차로바와 당테스의 스캔들은 끊이지 않았고 결국 푸시킨은 당테스와 결투해 총상을 입고 쓰러진다. 병원으로 옮겨진 푸시킨은 자신의 서재에 있는 수천 권의 책을 생각하며 “안녕 친구들”이라고 말하며 이틀 후 병원에서 사망한다. 

 

푸시킨은 삶을 속이지 않았다. 감정이 이끄는 대로 솔직하게 살았다. 삶이 푸시킨을 속일지라도 푸시킨은 슬퍼했고 노여워했다. 이 짧고 강렬하고 삶 끝에 남은 작품들만 푸시킨을 대변해 주고 있다. 러시아 문학의 대명사인 푸시킨은 러시아의 모든 작가들이 푸시킨이 개척을 길을 따라가며 후대 러시아 문학가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조언해 주고 있지만 정작 그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기쁨의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죽음을 택한 것은 아닐까.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려니”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6.08 05:33 수정 2023.06.08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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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