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당 한 곳을 책으로 가득 채웁니다. 책은 이내 넘쳐나서 대문 밖으로도 쌓입니다. 이런저런 일로 서재와 서고를 비우고 내친김에 짐을 이리저리 옮겨봅니다. 정리하면서 이런 것이 참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저의 경우에는 책 버리는 것과 옷 버리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집니다.
슬슬 비우는 것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어서 이번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시작합니다. 옷에 관해서는 누구나 할 말이 많고 입장도 다를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로서는 입지도 않을 옷을 그동안 꽤 껴안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눈감고 과감히 쓸 것과 안 쓸 것을 신속히 판단하면서, 보자기 위해 내놓을 것을 쌓아놓습니다. 내놓았다가 거두어들이는 옷이 몇 벌 있기는 하지만, 큰맘 먹고 유행이 지난 옷이며, 크기가 맞지 않은 옷, 해지고 곰팡이 핀 옷을 차곡차곡 쌓습니다. 그렇게 쌓인 짐을 몇 번에 걸쳐 의류수거함과 쓰레기장에 옮겨 처리했습니다.
다음은 책을 처리할 순서입니다. 책 또한 읽지도 않으면서 멋쩍게 책장에 진열해놓은 것, 보란 듯이 세트로 멋지게 꽂아놓은 책들, (기념으로 남겨둔 것인지) 어릴 적 읽었던 위인전, 전집, 백과사전류, 그리고 더러 선물 받고 저자로부터 증정받은 책 등등 많은 책을 분류해서 마당에 내놓고, 다시 한 구석에 쌓아놓고, 남겨서 가까이 두고 참고할 책으로 분류합니다.
어쩌다 이 많은 책과 옷을 껴안고 살게 된 것일까…. 아직 살아갈 날이 좀 된다면 우선 정리할 마음부터 굳히고, 마음을 비우고 물건을 치우는 것이 순서일 겁니다. 그래서 실행 첫날과 둘째 날 상당히 피곤할 정도로 작업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비우면서 어려운 것은, 아직도 “유용한 것 같은데 버려야 하나”라는 미련이 드는 순간입니다. 눈 딱 감고 내던져야 짐을 덜고 공간이 느는데 말입니다. 간혹 책을 내던지려다 몇 장 들춰보고 읽지도 않았던 책이어서 거두어들이기도 했습니다. 학식이 큰 분으로부터 물려받은 책 몇 권을 글 쓸 때 참고하기 위해 따로 보관하기도 합니다.
먼지가 살짝 묻은 한 권의 책이 나타났습니다. 언뜻 읽은 것 같기도 한데, 중간중간 들춰보고 이어 앞장을 열면서 내지에 적인 글자를 읽습니다. 그 책은 김원룡 수필집, 『하루하루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버릴 책이 무수한데 한 권의 에세이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검정 사인펜으로 쓰인 차분한 글씨는 저의 대학 졸업 날에 동생처럼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적은 메모였습니다.
兄의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일이 萬事亨通하기를
기원하면서….
198*년 2월 00일, 木
이 메모가 적힌 책은 한동안 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 그 오래전 후배가 졸업식 날에 지난 하루하루와의 만남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하루하루와의 만남을 생각하며 책을 주었다는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책을 선물한 후배의 마음을 생각하며 책을 거두어들였습니다.
현충일을 보냈습니다. 6월. 어느덧 한 해의 반이 지나는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갑니다. 『하루하루와의 만남』은 고고학계의 원로였던 고 김원룡 교수의 수필집입니다. 고고학을 업으로 하던 필자는, 고고학의 측면에서 보면 한 인간의 생이란 매우 짧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인지 그는 “인생은 어차피 ‘허황한 단막극’ 아니냐”는 말을 했습니다. 대문호인 셰익스피어 또한 인생이란 ‘세상사는 동안의 짧은 연극’(All the world’s a stage, and all the men and women are merely players.)이라고 표현했지요.
마음이 허한 차에 우연히 신문 한 면에서 ‘무산’ 스님을 기리는 기사를 봅니다. 스님은 낙산사와 백담사를 일구고, 오갈 데 없는 문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분이라고 하는데, 그 글을 쓴 필자는 무엇보다 ‘참회의 힘’을 알려준 시대의 스승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스님은 “‘이승의 삶은 모두 타향살이’이자 ‘하룻밤 객침’이다”고 했답니다. 그가 이승에서 그토록 사찰 중건과 발전에 힘쓴 공이 있음에도, 스님은 “누가 집 지은 사람을 기억하겠느냐”며,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살아온 ‘진실한 발자취’라는 것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바람을 따라 구름이 흘러갑니다. 바람을 따라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흐르고, 다시 바람이 흐르는 가운데 생각이 솟아납니다. 햇볕 뜨거운 것만큼이나 가슴에 뜨거운 것이 콸콸 솟아오릅니다. 전세 사기로 배를 불리고, “살인을 해보고 싶었다”라는 20대의 고백을 듣는 시대에, ‘진실한 발자취’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어디쯤 자리하고 있을까. 그리고… 내던지려던 『하루하루와의 만남』을 오랫동안 손에 쥐고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다가 책을 거두어들입니다. 삶이 건성건성 떠가는 날들 가운데 다시 ‘하루하루와의 만남’을 생각해 봅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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