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이 바뀌어 간다. 바야흐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증강현실과 같은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인간이 만든 컴퓨터 같은 기계가 딥러닝 등의 기계학습을 통해 사고, 추론, 계획, 판단 등의 지식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인공지능이란 말이 왠지 불편하다. 이미 실용화된 내비게이션이나 무인 주문 기계, 기계번역 기술, 스팸메일 필터링 서비스 등에서부터 자율주행 자동차, 우편 배달 드론, 웨어러블 컴퓨터 등도 현실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앞으로 일상생활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날지 가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유발 하라리의 3부작 <사피엔스> <호모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안>에서 가까운 미래에 현 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종말이 오고 현생 인류와 다른 인류가 지구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미래의 정보기술과 생명기술은 이번 세기 중에 알고리즘을 통한 인간 내부의 통제와 생명의 설계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한다.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모호한 포스트 휴먼의 시대, 가상과 현실이 융합하는 메타버스(metaverse)의 시대, 태생적 운명을 버리고 DNA 조작으로 인한 디자인된 인간의 시대, 그것들은 지금까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인간이 추구해온 문화와는 판이한 세상이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혼란스러워하는 세대가 지금 장년(長年)이 아닌가 한다. 현세의 한 생을 사는 동안 그 급변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손과 발로 해결하던 원시적인 농경사회도 경험했고, 급속한 과학의 발전으로 문명의 편리함을 누리던 산업사회도 겪었고, 이제 죽기 전에 인공지능 사회의 현실까지 눈앞에서 보아야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이 아닌 인간에 대한 거부감, 인간의 일자리를 뺏긴다는 불안감, 무엇보다 인간으로서 누려왔던 정서와 가치관이 변화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UN 미래 보고서는 2030년까지 20억 개의 일자리가 소멸하고, 현존하는 일자리의 80%가 사라진다고 한다. 향후 10년 이내에 없어질 것 같은 직업 베스트 10에 ‘아버지’를 포함한 연구 결과도 있었다. 그 아버지란 말이 너무 충격적이다. 앞으로는 결혼하지 않고도 체외수정 및 복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아버지는 공룡처럼 멸종해 버린다고 한다. 인공 자궁이 현실화하면 어머니도 마찬가지가 될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어머니’인데 그 인간의 모성 본능과 가족애가 깡그리 사라지는, 그래서 인간사회에 인간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정말로 무서운 시대가 오고 있는 것만 같다.
인간의 경험은 데이터로 완벽하게 정리되어 통제되고, 인간의 사유와 감정조차도 기계의 추측과 판단으로 좌지우지될 운명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쉽고 간단한 일조차도 자신의 가치관과 지혜로 결정하지 못하고 기계에 의존하려고 하는 태도가 만연되어 씁쓸하기만 하다. 그동안 인류가 해왔던 모든 일을 이제는 인공지능과 기계 인간이 그리스 신들처럼 자연계와 인간계를 평정해서 관장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어떤 모습이 될까. 어느 외국 영화에서처럼 인간은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어 무기력화되거나, 지하 하수구로 숨어들어 지상의 기계 인간들과 대항하면서 야생 동물처럼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은 춤추고 노래하고, 이기고 지는 게임을 하느라 운동장에서 아등바등하는데 기계 인간은 편안히 관중석에 앉아서 인간의 땀 흘림을 즐기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삶을 반추해보게 되는 것이 문화와 문명이다. 편리함은 문명이지만 편안함은 문화다. 문명은 머리와 몸이지만 문화는 가슴과 마음이다. 인간이 좀 더 편리한 생활을 하고자 과학이 꾸준히 발전되어 왔지만 그만큼 행복해지고 인간다운 삶의 문화가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책 대신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고, 마차 대신 빠른 승용차를 타고 다니지만 그렇다고 가슴이 더 뜨겁게 쿵쾅거리고 영혼이 더 맑고 순수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근심 걱정은 더 많아지고, 생존은 협력보다 투쟁으로 변하고, 모두가 경쟁의 늪에 빠져 이기주의가 만연되지 않았나 싶다.
과학이 발전해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와 더불어 대량 파괴 무기, 지구환경 파괴, 대형재난 사고 등 지구와 인류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상대적으로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대과학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가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야외에서 캠핑하는 취미가 귀찮고 불편한 일이지만 그 시간과 돈과 노력이 아깝지 않고 즐겁기만 한 이유가 뭘까. 도시의 문명과 시골의 자연을 좋아하는 차이처럼 편리함은 좋아함과는 분명 다른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의 <월하정인>이나 요즘 영화 <봄날은 간다>의 이별 같은 경우도 시대는 달라도 모두 똑같은 가슴에서 나오는 애절함과 애틋함 아닌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아미쉬 청교도 공동체처럼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신과 자연과 인간에 충실해 살아가던 젊은이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삶의 가치와 행복을 찾지 못하고 1~2년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울고 웃고, 참고 견디고, 아끼고 사랑하고,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화도 내고 눈물도 흘리고, 때로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면서 살아온 그 일들이 이제는 한때 인간들의 ‘낭만’이었다고 아쉬움을 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헝가리의 문예비평가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 첫머리에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그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하고 썼다. 그때의 시공간으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겠지만 감성과 영혼이 앞장서서 걷던 그 길은 이제 인류에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과거가 되어버린 것일까.
새 인류가 도달할 그 지점은 유토피아일까 아니면 디스토피아일까. 어차피 인공지능 사회라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다면 불안이 아닌 희망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인공지능을 통해 모두에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고, 처음부터 다시 인본주의에 맞는 사회를 재설계할 수 있다면 오히려 인류의 발전에 큰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적게 일하고도 의식주가 해결되고, 여분의 시간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을 뛰어넘어 세상이 공존하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면 인류가 꿈꾸던 진정한 행복이 도래할 수 있지도 않을까 싶다.
인공지능 시대가 되어도 봄은 올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세상은 꽃들로 피고 지고 꽃향기가 그득할 것이다. 여전히 새들은 지저귀고, 밤하늘에 별들은 반짝이고, 들판의 바람은 나그네의 이마를 간질일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공지능이고 인간은 인간이고,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신인류시대의 낭만과 멋과 여유를 한편으로는 조심스럽게 기대해본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