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24일(토) 통영도서관(관장 김금순)은 호국 보훈의 달을 맞아 "이순신 발자취를 따라서"라는 특별강연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강연은 서울에서 내려온 이순신 전문가인 이봉수 이순신전략연구소장이 맡았다.
이 소장은 지역 문화예술인, 향토사학자, 관광해설사,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2시간 동안 이순신 장군의 불패 신화와 주요 해전의 전개 과정 및 역사적 의의에 대해 강연했다.
이순신 전적지를 300회 이상 답사한 현장 전문가답게 이 소장은 역사적 기록은 물론이고 현장에서 채록한 구전 설화와 지명의 유래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다양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문: 한산대첩 이전에 이순신 장군이 학익진을 쓴 적이 있는가?
답: 이순신 장군이 함경도에서 제1차 백의종군을 할 때 우화열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학익진의 우측 날개에서 승자총통을 쏘는 책임자로 활약했다.
문: 이순신 장군이 청소년기에 전쟁놀이를 하며 아이들 가운데서 대장질을 하고, 질책하는 어른에게 활을 겨누는 등 행동을 했다는 기록은 어디에 있는가?
답: 이순신 장군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 나온다. 행록은 행장록이라고도 하며 요즘 말로 하면 일대기다.
문: 왜군들은 부산포 쪽에서 서진할 때 거제도 남단이나 진도 남단을 돌아서 가면 될 것을 굳이 이순신이 지키는 견내량이나 명량으로 통과한 이유는 무엇인가?
답: 당시 배는 무동력선으로 낮에는 지문항해를 하고, 밤에는 천문항해를 했다. 둘 다 해안 가까이 붙어서 항행하는 연안항해가 기본이었다. 거제도 남단이나 진도 남단은 망망대해로 안개가 끼거나 돌풍이 부는 등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함대를 수습하기 힘든다. 외해로 돌아가지 않아 항해 시간을 단축하는 것도 부차적인 목적이다.
문: 한산대첩 전날 당포 목자 김천손이 견내량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70여 척의 동태를 이순신 장군에게 알린 부분에 대한 견해는?
답: 일부 연구가들이 그날 김천손은 미륵산 정상에서 견내량의 적선을 보고 내려와 이순신 장군에게 보고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륵산에서 견내량까지는 직선거리가 약 10km이다. 육안으로는 적선의 윤곽도 파악하기 힘든 먼 거리다. 미륵산 정상에 10여 차례 올라가서 보았지만 날이 아주 맑은 날이면 거제대교가 보일 정도다. 미륵산 정상은 견내량에 있는 적선의 규모가 대선 중선 소선을 합쳐 70여 척이라고 헤아릴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김천손은 그날 적어도 적선을 육안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견내량 주변에 나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문: 통영연이 임진왜란 때 신호용으로 사용되었다는데?
답: 영화 '한산'에서도 방패연이 등장했다. 이 연을 '전술비연'이라고 하여 임진왜란 때 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구전설화는 통영과 여수 등지에서 전해 온다. 다만 전술비연에 대한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통영연에 대해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도 대단한 스토리텔링 소재가 될 수 있다. 야사라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을 두고 자살설, 은둔설 등이 있는데 여기에 대한 견해는?
답: 전투 중 적탄을 맞고 전사한 것이 정확한 팩트다. 자살설이나 은둔설 등은 호사가들이 지어낸 소설 같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순신 장군은 "단 한 척의 적선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각오로 최후의 일전을 벌이다 전사했다.
한편 이날 통영도서관은 이 소장의 저서 <이순신이 지킨 바다>에 저자 서명을 받아 질의자들에게 나눠주는 행사도 열었다. 부모를 따라온 초등학생들도 어른들과 함께 강연을 듣고 책에 저자 사인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