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때 미국에서 윈도 패션 디자이너(Window Fashions Designer)란 직업으로 살아본 적이 있었다. 창문 장식, 즉 커튼(드라페리)과 블라인드를 디자인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실내 분위기를 위해 커튼과 조명을 가장 중요시하고 만만치 않은 비용을 과감하게 투자하는 편이다.
따라서 수천 가지 샘플북의 천을 고르고, 각양각색의 모양을 디자인하고, 솜씨 있게 제작해서 설치하기까지 보통 신경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커튼 천을 고르는 일이 무척 까다로웠다.
처음에는 시행착오가 많았다. 톱과 다운, 라이닝 색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아무리 밝은 햇빛 아래 꼼꼼하게 고른 천이라도 막상 설치해놓고 보면 처음에 생각했던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코앞에 샘플북을 본 것과 적당한 거리에서 떨어져 바라본 채도나 명도, 비율과 균형은 또 다른 것이었다.
삶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사랑이나 직업, 인간관계 등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택과정에서 알게 모르게 실수나 상처가 많았다. 가족이나 친구, 직장동료에게도 많은 오해와 불신의 순간이 있었고 그로 인해 미움과 원망의 힘든 시기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잘못된 판단, 편협하고 이기적인 주장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여기며 때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사랑이 이별이 되고, 우정이 배신이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매사에 조급했다. 당장 눈앞의 이익이나 체면에 급급하거나, 순간의 유혹이나 충동에 목매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불꽃 같은 사랑도 너무 가까우면 구속이 되고, 뜨거운 화로도 너무 다가서면 화상을 입는 법이다. 집착이나 욕망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무슨 일이든 내가 많이 손해 보고, 내가 먼저 억울하다는 생각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이해관계란 것은 나의 입장과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였다.
잠시 시간이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대부분 오해에서 비롯된 일들이었다. 알고 보면 그에게도 그만의 안목과 방향이 있었고, 그럴만한 이유와 원인이 있었다. 제삼자적 관점이나 상대방의 처지에서 보면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인데 내 경우, 내 현실 상황에서만 따지고 든 것이 문제였다. 너무 가까운 탓에 객관적 실체를 보지 못하고 전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빛, 별빛을 보기 위해 망원경이 아니라 현미경을 들이대었던 셈이다.
사연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며 까닭 없는 사물이 어디 있을까. 상대방이 힘들어하면‘무슨 일일까?’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기다리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를 못했다. 젖어있는 눈빛이나 떨고 있는 손은 가깝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소통과 화해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했다. 어디까지나 나와 너의 객체 속에서 필요한 거리를 두고 서로에게 공약수와 교집합을 찾았어야만 했다.
인생은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좋았다가 나빴다가, 흥했다가 망했다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는 법이다. 계절이 바뀌고, 방향이 바뀌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드러날 수도 있고 그만큼 새로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것도 어느 시간에, 얼마큼 떨어진 거리와 높이에서, 어느 정도의 이해와 능력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과 같다.
살아있는 것들은 서로의 삶이 다르다. 취향, 가치, 능력, 언어 등 삶의 목적과 태도가 제각각이다. 그 다른 만큼 자기만의 편향된 시선과 각도에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공동체의 기본 덕목이다. 진정한 연대는 서로의 목소리가 뭉개질 만큼 가깝지 않으면서도 가닿지 못할 만큼 멀지 않은 거리에서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젊은이들에게도 못마땅한 점이 종종 있다. 우리 세대보다 성실하지도 않은 것 같고 삶의 목표나 가치관도 사뭇 비생산적이고 나약하다는 생각도 든다. 공정과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이고, 주체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면서도 의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조금만 멀리서 보면 거기에도 다 관점과 논리가 있고, 또 다른 아픔과 슬픔이 있고, 숨겨진 그들만의 노력과 열정과 삶의 방향이 있다. 상호 간에 이해와 관용의 폭이 없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멀리서 보는 것이 아름다운 경우가 많다. 시인의 말처럼 가을 산의 단풍도 멀리서 보아야 예쁜 것이지 가까이 다가가면 이파리마다 하나같이 찢어지고 멍들고 구멍 난 투성이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도 있다. 무한한 공간 속에 좌우가 없고, 영원한 시간 속에 앞뒤가 없다는 말도 결국 한 발짝 물러서서 보라는 뜻이 아닐까.
어느 해였던가, 교보문고 광화문 글판에 전봉건의 시가 걸려있었다. ‘지키는 일이다. 지켜보는 일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은 적극적으로 용기를 내어 누군가를 지키는 일이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두면서 지켜보는 일이기도 하다. 어둠 속에서 믿고 지켜보는 것이 어쩌면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인지도 모른다.
내 삶에도 여백이 있었으면 좋겠다. 멀리 서야 여백이 보인다. 원인이나 과정도 보이고, 균형미와 절제미도 보인다. 기승전결이 완벽한 수묵화처럼 여백이 있는 삶을 만들고 싶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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