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시인 백석의 시 '국수'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백석의 '국수'는 꿩 국물과 동치미 국물을 섞어 육수로 쓰고 겨울에 즐겨 먹었다는 요즘 말로 치면 평양냉면이다. 평북 정주 출신인 시인에게 메밀로 만든 이 국수는 오랜 옛날부터 먹어온 고담하고 소박한 고향의 맛이었다.
무더위가 시작된 요즈음, 시원하게 열을 내려주고 별다른 찬을 곁들이지 않아도 입맛을 돋우는 국수 생각이 간절하다. 여름철 별미인 콩국수는 기다랗게 채 썬 오이와 토마토를 올려, 먹음직스러운 비주얼로 식감을 자극한다. 국물은 신선한 콩과 견과류를 함께 갈아 만들어 콩 비린 맛이 덜하다.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백김치와 겉절이를 함께 곁들여 먹으면 더위는 저 멀리 달아나고 없다.
콩의 제철은 가을이건만 왜 콩국수 제철은 여름일까? 콩을 곱게 갈아 국물을 내고 면을 말아 먹는 역사는 꽤 오래됐다. 조선 시대 말에 편찬된 조리서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콩국수 조리법이 나온다. 예부터 콩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흔히 재배한 먹거리면서 영양소는 풍부했다. 그러면서 쇠고기, 돼지고기에 비해 가격은 저렴했으니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이들이 반길 만한 여름 보양식으로 안성맞춤이었다. 비록 요즘은 인건비와 재료비가 너무 많이 올라서 콩국수나 냉면은 더이상 ‘부담 없는 한 끼’라는 수식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지만.

어머니가 맷돌로 콩을 갈아 꾸미 한 점 없이 그저 채 썬 오이만을 고명으로 얹은 콩국수 기억 때문일까, 필자는 여름만 되면 콩국수를 즐겨 찾는다. 맷돌은 곡식을 가는 우리의 전통 도구다. 맷돌은 위와 아래의 두 돌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위쪽에 난 구멍으로 곡식을 넣으면 맞물린 두 돌의 틈으로 곡식이 빠져나오면서 갈리게 된다. 여기서 '맷돌의 위쪽 돌에 달린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부른다. 맷돌을 돌리려면 반드시 있어야 할 부속품이다. 아무리 좋은 돌로 잘 만든 맷돌이라도 어처구니가 없다면 정말 말 그대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인 셈이다.
어떤 일을 겪고 나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다' 또는 '어이가 없다'는 말을 한다. 어처구니가 없으면 어떻게 될까? 맷돌로 곡식을 갈 수가 없다. 따라서 어처구니는 어떤 물건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꼭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부분을 가리키는 용어다.

어릴 때 필자의 집에는 동네에서 제일 큰 맷돌이 있었다. 어머니가 미리 불려둔 백태를 삶아 커다란 함지에 담아 내오면 맷돌 구멍에 백태를 한 줌씩 부으면 필자와 누나가 어처구니를 잡고 같이 돌렸다. 무거워서 한 바퀴 돌리는 데도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지만 맷돌짝 틈새로 질금질금 콩물이 비어져 나오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었다. 맷돌로 간 콩물은 입자가 거친 듯했지만 진하고 고소했다. 내 기억 속에 콩국수는 푸짐하게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좀 모자란 듯해서 국물 한 방울까지 싹 비우게 되는 음식이었다. 집에서 만들어 먹는 음식이지만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엔 그냥 뚝딱 말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콩국수 한 그릇에는 어머니의 자애로운 정성이 담겨 있었다.

한여름에 우리 집은 콩국수를 해 먹으려고 콩을 갈기 위해 찾아오는 동네 사람들로 늘 문전성시였다. 이럴 때는 자칭 맷돌 장인(匠人)인 필자가 마을 사람 앞에서 맷돌 돌리는 시범을 먼저 보인다. 그냥 개념 없이 어처구니를 돌리면 두 돌이 균형을 잃어 윗돌이 쉽게 분리되는데, 어처구니를 잡고 일정한 방향으로 고르게 힘을 가해야 두 돌이 균형을 이루면서 콩이 고르게 잘 갈리게 된다.
맷돌은 주로 제주의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든다. 우선, 맷돌은 곡식 가루에 열변성을 크게 입히지 않는다. 맷돌이 회전할 때 속도는 초속 0.5~1m 정도다. 이에 비해 가정용 전기 믹서는 이보다 10~100배 빠르다. 결국 맷돌은 믹서기에 비해 엄청나게 낮은 열에너지를 내는 셈이다. 믹서로 곡물을 분쇄하면 상당한 고열의 발생과 함께 곡물가루의 조직도 크게 손상시킨다. 콩을 믹서에 갈면 콩물이 고열에 의해 산화되어 비린내가 심하고 고소한 향과 맛이 덜하다. 그에 비해 우리 맷돌은 식품의 자연성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학적 분쇄 기능을 지닌다.

맛있고 영양 만점인 콩국수를 여름 한 철에만 먹을 수 있다는 건 비극이다. 여름철 단골 메뉴인 냉면이나 삼계탕은 사철 음식이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유독 콩국수만 1년 내내 하는 전문점이 거의 없다. 대개 칼국수 집이나 분식점 등에서 여름 한정 메뉴로 콩국수를 내기 때문이다.
지금 염천(炎天) 땡볕의 여름이 한창이다. 속절없이 이 여름이 가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콩국수는 기다림의 음식이다. 그리움의 맛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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