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음’, 토론은 대체 왜 하는 걸까?
어느 날, 라디오를 듣다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DJ분이 요즘 유행하는 말로 ‘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음’이라는 게 있다고, 참 독특한 유행어라고 생각했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모순적인 말입니다. 상대방이 반박할 경우, 재반박을 거치는 게 아니라 그냥 인정하고 대화를 끝내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대한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게 아니라 원천적으로 비판을 봉쇄하는 꼴입니다.
한편으론 상처만 많은 대화가 난무하는 가운데, 참 어울리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보면, 종종 민감한 주제에서 소수의견을 낼 때입니다. 돌이켜보면 특히, 익명 커뮤니티에서 정치나 사회 문제에 대해 논할 때, 이 ‘반박 시 네 말이 다 맞음’이라는 말을 자주 만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기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인신공격과 불평불만을 만나기도 했죠. 그런 인신공격적 논쟁에 지친 사람들은 비판은 듣기 싫고, 그냥 내 의견만 들려주겠다며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저도 그저 남일로 치부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문제는 이런 태도가 사람들이 실제로 토론할 때도 보인다는 겁니다. 대화하려고 모인 자리에서 각자 이야기만 하고 끝나는 경험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했던가요. 형식적으로 다수결의 원리에 맡기고, 회의에서 나타난 소수의견은 대체로 무시하는 그런 경우 말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내 의견을 얘기는 했으니, 이걸로 족하다고 위안하며 회의실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얘기를 끝내도 좋은 걸까요,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많은 사람이 원하면 그걸로 된 걸까요? 그런 당신에게 19세기 영국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일침을 가합니다. 어떤 토론에서든 소수가 그저 침묵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더 많은 토론은 사회의 행복을 증가시키면, 증가시켰지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토론을 포기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의 해악에 가깝고, 당신이 토론을 계속하려는 태도야말로 바람직한 행동에 가깝다고, 그래야 더 진리에 이를 가능성이 커진다고.
토론은 방관자에게 더 유익한 것
그는 『자유론』이란 책에 요즘 들어 더 생각해볼 가치가 있을 듯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아무리 토론을 자유롭게 허용하더라도, 사람의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안다. 오히려 토론이 더 격렬하고 악화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반대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개진한 의견이라서, 더 억지를 부리며 진실을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의견의 충돌은 (어떤 논쟁에 있어서) 열정적인 지지자보다는, 무관심한 방관자에게 더 유익한 효과를 낳을 것이다. ⸱⸱⸱ 진실의 파편은 모든 주장에 조금씩 남아있기에, (방관자가) 모든 주장에 대해 옹호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 주장도 경청할 수 있을 때, 진실에 이를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자유론, 49쪽
밀은 영국 하원의원으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는 사람들이 앞에서는 토론을 좋아한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소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당시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영국은 가난한 사람들은 넘쳐났으며, 범죄율 또한 급증하고 있었는데, 밀은 그런 빈민을 구제하고, 모두에게 교육을 의무화해 성숙한 시민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의 삶에 계속 관심을 두고, 인류의 복지를 개선하기 위해 토론하는 등의 행동이야말로 진정한 개인주의며, 자유(Liberty)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빈민을 구제하겠다는 밀의 의견은 곧잘 무시되곤 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민주주의 사회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는 다수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을 다수의 횡포(Tyranny of the majority)라고 칭하며, 영국에 이 다수의 횡포가 만연하다고 말했습니다. 나아가, 다수의 횡포가 만연한 세상에는 개성이 자라날 수 없으며, 자유가 침해당한다고 비판했습니다. 그가 느끼기에 영국 사람들은 산업혁명으로 불어난 돈에는 관심을 두었지만, 타인의 복지나 안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밀이 생각하는 건강한 사회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러니 밀이 다수의견이 다수의 횡포로 진행되는 것을 막고, 공적인 관심사에 대해 계속 토론하는 것을 자유주의(Liberalism)의 한 덕목으로 삼은 건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어떤 주장이 절대적인 여론으로 분류되는 순간, 사람들의 개별적인 목소리는 사라지고, 대화 흐름 역시 천편일률적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정작 그 여론 안에는, 다양한 의견이 도사리며 반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다수의 횡포를 막을 수 있을까요? 밀이 고민 끝에 내놓은 답변은 다시 그 다수의 횡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토론에 참여하는 다수가 생각을 자유롭게 하도록 만들며, 토론을 이어가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진리의 쓸모까지 토론의 대상으로!
“정말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자유 토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끝장 토론은 반대한다는 거다. ⸱⸱⸱ 그들이 의심스러울 수도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해야 한다는 건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어떤 원칙이나 신념은 아주 확실하므로 질문을 받는 걸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마치 자신이 진리의 심판자이므로 다른 의견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유론, 23쪽
밀은 사람들이 토론에 참여하며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어떤 주장이 종종 진실인지 여부를 떠나, 그 주장이 유용한지 아닌지에 따라 지지받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A라는 정치인이 범죄를 저질렀는지 아닌지를 주제로 토론이 있다고 합시다. 이때, 어떤 사람들은 A가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떠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게 유리하다면, 그가 무죄라고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정치의 모습이죠.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이 부분에서, ‘그렇지, 이익에 눈먼 사람들 때문에 사회가 이 모양이야’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한 발짝 더 나아갑니다. 그는 단순히 그런 태도가 틀렸다고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어떤 주장이 쓸모 있는지 없는지 즉, 효용의 가치를 따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대신 그 주장이 정말 쓸모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지,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행복을 생각할 때도 그러한가 등을 다시 토론에 부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진리 자체도 쓸모의 문제로 볼 수 있으므로, 개인의 이기심을 인정하고, 이를 솔직히 드러낼 때 오히려 토론이 더 나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독자 중에는 아마, 진리를 효용의 문제로 단순화시키는 게 불편한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밀의 공리주의적 관점을 자세히 다룰 수 없으나, 간단히 얘기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공리주의는 개인 행복의 총합이 곧 사회 행복이라고 보는 관점으로, 개인이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을 존중합니다. 다만 밀은 앞선 시대의 공리주의자와 달리, 질적으로 상위인 행복이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그 유명한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가 그가 남긴 말이죠. 그러니 개인의 이익을 다시 토론에 부치며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밀의 철학에 견주어 보면, 아주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대신 그 토론에서는 개인의 이익을 다루면서도 더욱 장기적인, 인간을 드높이는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해 얘기하며, 행복의 질을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바꿔야만 했습니다. 가령 여러 선택지 중에 어떤 게 더 정의로운지, 더 개성을 보장하는지, 더 아름다운지 등을 이야기하며 말입니다. 이것이 밀이 내놓은 해결책이었습니다.
또 다른 해결책, 생각의 자유를 기르는 교육
이렇듯 밀은 토론이 중단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끝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론』을 끝맺으며,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우리는 어떤 사람을 길러낼 것인지 묻습니다.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를 또 한없이 고민에 빠뜨리죠. 그는 ‘생각의 자유’야 말로 개인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라고 말하며 교육을 강조합니다. 아이들이 공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잘 배우고 있는지, 공공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으로 자라고 있는지, 아니면 사적인 행복에만 관심있는 이해타산적인 사람으로만 자라고 있는지 묻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답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잘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교육을 할 수 있을까요? 감히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교육학을 공부하는 저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낙관적입니다.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며 고민한다는 자체만으로 우리가 그 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당신이 밀이 말하는 이상적인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박 시 당신 말이 무조건 옳다고 외치는 사람보다, 그 반박을 받아들이며 같이 의논해 보자는 사람이 사회에 많아질수록, 아이들은 토론하는 법을 배우며, 바람직한 사람으로 자라날 겁니다. 그런 날을 위해, 이상적인 당신과 함께 토론하기를 기다려 봅니다.
* 자유는 사적인 자유(Freedom)와 공적인 자유(liberty)로 구분될 수 있다. 전자(Freedom)는 사생활, 종교, 자유로운 거래 등을 의미하는 자유지만, 후자(Liberty)는 보다 정치적인 의미의 자유로, 정치적 억압이나 지배로부터의 자유는 물론, 좋은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행복이 더 질적인지 등을 논하는, 무엇을 향한 자유를 포괄한다.
참고한 책
John Stuart Mill, 1859. On liberty(자유론). Batoche Books Limited 2012, Ontario, Canada.
K People Focus 필진 아사달97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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