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
호사카 가즈시의 그림책 ‘춤추는 고양이 차짱’을 읽는다.
‘나는 고양이 차짱.’, ‘나는 죽었습니다.’
그런데 회오리치는 들판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다른 사물들, 꽃봉오리, 꽃잎들, 나무들, 나뭇잎들, 구름들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아니 춤추고 있습니다.’
그렇다. 지금 고양이는 춤을 추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들과 함께. 고양이는 혼잣말한다.
“‘죽었다’와 ‘춤추다’는 다른 건가?”
‘살아있을 때는 달리고 놀고 또 달렸습니다.’
“밥? 그게 뭐더라?”
고양이는 이제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다. 육신만이 뭘 먹어야 하니까.
“‘춤추다’와 ‘놀다’의 차이요?” “그런 건 없을 텐데...... .”
“‘죽다’와 ‘살다’는 다르다고요? 모르겠어요. 죽어있든 살아있든 나는 나니까.”
‘죽어있든 살아있든’ 나는 나인가? 맞다! 나는 명상을 하며 ‘불생불멸’이 천지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느낀다. 깊은 명상 상태에서는 나는 그냥 나다. 어떤 이름으로도 불릴 수 없는 존재. 그게 나다. 그렇게 나는 존재한다. 영원히.
고양이는 춤추며 말한다.
“슬프냐고요? 아니요.”
“언젠가 엄마 아빠도 여기로 올 거잖아요.”
죽으면 다 함께 만나는 세상, 바로 죽음 이후의 세상이다. 아니 이미 지금, 우리는 죽은 자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춤을 추며. 우리 몸은 언제나 춤을 춘다. 숨을 쉬고, 팔다리를 움직이고, 피가 돌고, 세포가 죽고 태어나고...... .
‘새는 노래합니다!’ ‘물고기는 헤엄치며 팔딱거려요!’ ‘고래는 헤엄치며 노래합니다!’ ‘지렁이도 춤을 추지요!’ ‘춤을 추다 보면 새는 금세 날아올라요.’ ‘아, 이것 봐요!’ ‘나도 날고 있어요!’
현대양자물리학에서는 “천지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춤”이라고 말한다. 에너지의 영원한 율동. 그런데 우리는 태어남과 죽음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물질주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나’라는 언어에 집착한 결과다.
‘나’라는 언어가 자의식(自意識)을 만들어 내고, 우리는 자신이 실재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한 생각을 멈추면 우리는 ‘영원히 춤추는 존재’가 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 진화한 인간은 다시 진화해야 한다.
‘생각’을 넘어, 삶과 죽음 전체를 통찰할 수 있는 존재로. 지금은 소수의 인간, 성현들만이 이런 진화를 한 것 같다.
불면은 꿈꾸지 않기를 꿈꾸는
또 다른 꿈임을,
우리네 육신이 저어하는 죽음은
꿈이라 칭하는 매일 밤의 죽음임을 체득하는 것.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학> 부분
시인은 말한다.
“우리는 꿈속에 살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생각’ 속에 산다. 생각이 이 세상의 사물을 창조한다. 그러다, 생각을 거두면 나와 이 세상의 사물들도 다 사라진다. 이 세상 전체가 꿈이다.
생각을 멈추면, 우리는 꿈을 깬다. ‘생생한 삶’ 우리는 영원한 삶 속에 있게 된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