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간에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신문의 문화면은 말할 것도 없고, 잡지나 사보 같은 데서도 단골로 다루어지는 소재가 되었다. 무슨 무슨 스토리텔링이라는 이름으로 상금을 걸고 이런저런 공모전도 다투어 열린다.
이 스토리텔링이란 말에 나는 이상스럽게도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학부 시절 문학 강의를 하시던 은사님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온 말씀 때문이다.
“스토리는 시간 순서에 의한 구성이어서 예술성이 없다. 그러므로 인과 관계에 의한 구성인 플롯이라는 용어를 써야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가르침은 일찍이 영국의 소설가 포스터(E. M. Forster)가 설파한 이론이었다. 그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곧 스토리(story)와 플롯(plot)이 그것이다. 단순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것을 스토리라 하고,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부여하여 사건을 입체적으로 펼쳐 나가는 것을 플롯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스토리는 시간적 순서에 따라 사건을 서술하다 보니 언제나 ‘그 다음에는’이라는, 이어지는 이야기의 내용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플롯의 경우는 인과 관계를 부여하여 사건을 짜임새 있게 배열하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에 따라 논리적 판단과 지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소설의 구성상에서 어떤 미적 계획에 의해 이야기의 내용을 유기적으로 얽어 짰을 때 그것이 바로 플롯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예컨대 “왕이 죽었다. 그리고 왕비도 죽었다.”라고 표현하면 스토리가 되지만,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고 표현하면 플롯이 되는 것이다.
포스터의 이론대로라면, 소설 창작에서 스토리는 그다지 권장할 만한 방법이 못 되고 플롯이 글 쓰는 이들이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기법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 플롯이라는 말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온통 스토리라는 말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나의 알량한 식견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스토리텔링이란 단어는 ‘스토리(story) + 텔링(telling)’의 합성어이다. 낱말 뜻 그대로 풀이하자면 ‘이야기 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상대방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흥미진진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스토리는 평면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기법이 단조로워 예술성을 갖지는 못한다.
어차피 스토리텔링이라는 것이 합성된 용어라면 ‘플롯텔링’이라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용어가 아니겠는가. 미적인 가치나 예술적 완성도 면에서는 스토리보다는 플롯이 훨씬 우위에 있으니 말이다.
이치가 이러함에도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이 요원의 들불처럼 유행하는 현상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러한 풍조를 나는 사람들의 줏대 없음에서 찾고 싶다. 우리 속담에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남들이 “스토리텔링” “스토리텔링” 하니 덮어놓고 따라 한 결과 그리 된 것이 아닐까, 싶은 강한 의아심을 지울 수 없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골치 아프게 머리 쓰기 싫어하는 현대인의 속성에 기인한다고 본다. 스토리는 구성이 단조롭기 때문에 쉽게 쓸 수 있고, 동시에 쉽게 읽힐 수 있다. 반면 플롯은 복잡한 구성을 필요로 하므로 쓰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읽는 데도 고도의 사고력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이쯤 되면 결론은 이미 내려졌다. 앞으로는 예술성이 결여된 스토리텔링이란 용어보다는 미적 가치를 지닌 플롯텔링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스럽지 않을까 한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