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왕의 숲′, 광릉(光陵) 숲길

여계봉 선임기자

 

올여름 기록적인 폭염과 폭우로 세계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국을 강타한 장마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었다. 열섬으로 데워진 7월의 도심을 벗어나고 싶어 남양주에 있는 광릉으로 달려간다. 신록에 물든 여름 숲에 들어서서 보물같이 숨어 있는 길섶의 작은 꽃들 사이로 풀냄새를 실은 바람도 느끼며 유유자적 걷다 보면 어느새 더위는 사라지고 세속에 찌들었던 몸과 마음도 말끔히 헹구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처럼 숲이 가진 치유력은 대단하다. 

 

여름날 숲에 들면 무더위가 저절로 달아난다.

 

550여 년을 지켜온 광릉숲에는 조선 시대 왕사(王寺)였던 천년고찰 봉선사와 조선왕릉 ′광릉(光陵)′, 그리고 국립수목원이 이웃하고 있다. 조선왕실에서 광릉을 중심으로 사방 15리의 숲을 광릉 부속림으로 지정해 조선 말까지 철저하게 보호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림과 임업 연구를 위한 학술 보호림으로 지정되었고, 한국전쟁 때도 큰 피해 없이 잘 보존되었다. 1987년 광릉 수목원으로 만들어진 뒤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10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됐다. 

 

오늘은 봉선사에서 출발하여 광릉을 거쳐 국립수목원을 이어주는 광릉숲 둘레길의 산림욕길(왕복 6km)을 걷게 되는데, 이 길은 광릉숲 둘레길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 이 길에는 테마 별로 10개의 아담한 정원도 만들어져 있어 나무데크 길을 걸으면서 다양한 꽃과 나무로 이루어진 숲을 모두 감상할 수 있다. 

 

광릉숲 둘레길 7코스 지도(봉선사↔국립수목원)

 

광릉 숲길의 출발지인 운악산 봉선사(雲嶽山 奉先寺)는 사찰이 도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여염집이나 공원 같은 친숙한 모습이어서 늘 사람들로 붐빈다.  1469년(예종1)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는 고려 시대 사찰인 운악사를 봉선사로 개칭하고 세조를 모신 광릉을 관리하는 능침사찰로 지정하면서 89칸을 중창하였다. 따라서 봉선사는 한양 이북에서는 가장 큰 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큰 획을 그은 봉선사는 현재는 조계종 제25교구의 본사로, 한수 이북을 대표하는 사찰로 널리 알려져 있다.

 

봉선사의 명물, 연지(蓮池) 

 

일주문과 부도전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나무는 500여 년 전, 정희왕후가 남편 세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선사를 중창한 후 심었다고 전해진다. 정희왕후는 봉선사를 교종(敎宗)의 중심사찰로 지정하여 승과(僧科)를 치르게 하고 전국의 승려와 신도에 대하여 교학을 진흥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이에 따라 봉선사는 교학 진흥의 중추적 사찰로서 오랫동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정희왕후가 심은 봉선사 느티나무가 500년 넘게 광릉숲을 지켜보고 있다.

 

봉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때 비운을 겪은 사찰로 지금의 사찰은 1960년 이후의 모습이다. 대웅전의 전각 편액이 한글로 ′큰법당′이라고 쓰여있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서 불교 대중화를 화두로 평생을 정진한 운허스님의 의지가 담긴 현판이다. 운허스님은 어려운 경전을 이해하기 쉬운 한글로 번역하고 국내 최초의 불교사전을 편찬하는 등 불교 대중화에 앞장선 인물이다. 스님은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우리 말로 번역하는 일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색적인 봉선사 대웅전의 한글 편액 ′큰법당′

 

봉선사를 둘러보고 일주문을 나와 왼쪽으로 가면 광릉 숲길이 시작된다. 이 길은 거의 나무데크길로 조성되어 있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 광릉 숲길의 나무들은 대부분 50년 이상 되었으며 어떤 나무들은 그 크기가 하도 우람하여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감탄하게 한다. 광릉숲은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우리나라 산림생태계의 보고이자 550년 역사를 간직한 ′왕의 숲′이다. 숲의 경이로움을 만끽하면서 걷다 보면 도무지 지루할 틈이 없다. 오감을 일깨우는 자연의 빛과 소리, 향기에 취해 사부작사부작 걸으면 더위는 저만치 물러가 있다. 걸을수록 건강한 자연을 만나고 흘린 땀방울만큼 보상을 받는다.

 

광릉숲 둘레길의 백미 ′산림욕길′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숲길 오른쪽으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침이 있는 ′광릉′이 자리한다. 영화 <관상>의 주인공이자 계유정난으로 조카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 즉 세조가 묻힌 왕릉이다. 광릉은 조선 최초로 정자각을 중심으로 서로 다른 언덕에 능을 조성한 이른바 동원이강(同原異岡) 형태의 능으로 잘 알려져 있다. 1468년 조선 7대 왕 세조의 장지로 결정된 이래 550여 년 동안 엄격하게 관리돼온 ′광릉숲′의 이름은 1469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세조의 능침을 ′광릉(光陵)′으로 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능침이 자리 잡기 전 광릉 일대는 왕실의 사냥터와 군사훈련장으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니 숲은 훨씬 오래전부터 관리가 되어온 셈이다. 광릉의 울창한 숲 덕분에 조카를 죽인 비정한 세조의 이미지가 많이 가려진 셈이다. 조선왕릉 중 가장 원시적인 숲을 품고 있는 ′비밀의 숲′은 1년에 1~2차례 ‘조선왕릉 숲길’ 개방 시기에 맞춰 일반에게 탐방 기회를 제공하는데, 올해는 단풍 시즌인 10월에서 11월 사이에 개방 예정이라고 안내를 맡은 해설사님께서 살짝 귀띔해 준다. 

 

 ′왕의 숲길′을 걷다 보면 만나게 되는 광릉

 

광릉 숲길의 끝에 있는 국립수목원은 숲 보존을 위해 1일 4,500명만 입장이 가능하다. 총 102ha 면적에 3,300여 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국립수목원은 수생식물원, 약용식물원 등 24개의 전문수목원과 ‘걷고 싶은 길’이란 이름으로 조성된 7개 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먼저 산림박물관에 들러서 풀과 나무 공부를 마쳤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국립수목원을 둘러볼 시간이다. 하루에 이 모두를 둘러보는 건 불가능하니, 안내도를 확인해서 관심이 가는 곳 위주로 보는 것이 좋다. 더운 여름철에는 수목원 속 연못인 ′육림호′를 거쳐 ′힐링 전나무 숲길′로 이어지는 ‘걷고 싶은 길’을 추천한다. 7, 8월에는 수목원 곳곳에서 여름이 차려낸 숲의 성찬을 눈요기하며 그늘 길을 느긋하게 걷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련으로 잘 알려진 국립수목원의 육림호

 

 

′힐링 전나무 숲길′을 따라 수목원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면 이제 막 수련이 피기 시작한 육림호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못가에는 노랑꽃창포, 부처붓꽃 등이 어우러져 반기고, 고요하고 한적한 연못의 물살을 가르며 후드득 하고 내려앉는 백로도 볼 수 있다. 더운 여름, 우거진 나무가 만드는 시원한 호숫가 그늘에서 잠시 생각을 비우고 하염없이 쉬어가는 건 어떨까? 육림호 둘레길 한쪽 편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식목일에 심은 은행나무가 있다. 우리나라 산림녹화의 시발점이 된 상징적인 나무인데 식수 당시 14년생이라던 묘목은 어느덧 풍채를 키워 탐방객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선사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0년 식목일에 심은 은행나무

 

육림호를 한 바퀴 돌아 나와 다시 ′힐링 전나무 숲길′을 따라가면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 숲, 전북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 중 하나로 꼽히는 국립수목원 전나무 숲이 기다리고 있다. 곧은 자세로 하늘을 향해 치솟은 듯 빽빽하게 자리한 전나무들은 1927년 조림돼 100년 가까운 수령을 자랑한다. 일부 구역은 휴식년제에 들어가면서 숲길 안쪽 탐방이 제한되어 있지만, 숲 근처에만 가도 전나무가 뿜어내는 싱그러운 공기를 실컷 마실 수 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가 되는 국립수목원의 전나무 숲

 

여름은 숲에게 필요한 것들이 풍성한 계절이다.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여름 숲은 늘 축축하다. 열을 빼앗긴 숲은 항상 서늘해서 숲이 마르는 일이 없다. 그리고 나뭇잎들도 진하고 두툼하다. 온갖 널찍한 이파리를 가진 나무들이 여름의 치열함을 몸으로 막아준다. 그래서 숲에 들면 더위는 저만치 물러난다. 

 

′휴(休)′라는 한자처럼 온전한 휴식은 나무와 함께 하는 것이다. 유독 무더위가 심하다는 올여름에는 우리 주변 가까이에 있는 숲을 자주 찾을 일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수필가

공학박사

이메일 :yeogb@naver.com

작성 2023.07.23 11:23 수정 2023.07.23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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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