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의 낭만詩객] 나는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네

이순영

여자 친구를 위해 장미꽃을 꺾다가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남자,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라는 묘비명을 가진 남자, 일제 식민지의 백성인 백석과 김춘수와 윤동주에게 시의 영감을 준 남자, 프랑스의 자존심 로댕의 비서를 지낸 남자,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준 남자, 망치든 철학자 니체가 사랑한 여인 루 살로메를 사랑한 남자, 그 남자는 오스트리아가 낳고 독일이 키운 세계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다.

 

릴케라는 이름이 주는 따뜻하고 헛헛함으로 나는 젊은 날을 견뎌왔다. 릴케의 시를 읽으며 사랑을 키웠고 또 사랑을 잃었다. 삶이 뭔지도 모르면서 앞사람을 좇아 따라갔다. 그러다가 내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삶이란 그런 거라고 누군가 위로했지만, 위로가 되지 않아 혼자 운 적도 많다. 릴케를 만나고 조금은 위로받으며 이 세상에 나를 위로해 줄 사람도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의 시는 가슴으로 스며드는 아침 햇살 같았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온화한 느낌의 아침햇살로 젊은 날의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았네’처럼 나도 넓어지는 원 안에서 나를 찾기 위해 무던히 애쓰며 살았다. 나는 무엇인지, 나는 누구인지, 나와 세상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릴케의 시를 읽으며 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실존의 고뇌를 겪었던 릴케처럼 나도 실존의 고뇌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의 시를 읽었다. 그렇게 젊음이 갔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이 되어 그를 이해할 나이가 되었다. 그의 시도 이해가 되고 그의 인생도 이해가 되는 지금 그는 시인이라는 따뜻한 이름으로 다시 내 앞에 서 있다.

 

넓은 원을 그리며 나는 살아가네.

그 원은 세상 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네

나는 아마도 마지막 원을 완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그 일에 내 온 존재를 바친다네

 

신 주위를, 태고의 탑 둘레를 빙빙 도네

그리고 억겁의 시간을 돌고 있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하네.

내가 한 마리 독수리인지, 폭풍인지, 

아니면 대단한 노래인지

 

백 년 전 그를 불러낸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세계 문화의 신화를 쓰고 있는 BTS 멤버 지민은 자신의 몸에 릴케의 시 ‘나는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네’를 독일어 원문으로 새기고 온몸으로 춤을 추었다. 릴케의 시가 BTS 멤버 지민에 의해 세계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고전의 힘은 위대하다. 고전은 리라이팅을 통해 다시 태어난다. 문화를 선도하는 BTS에 의해 릴케는 다시 태어나고 그의 시는 새로운 옷을 입고 사람들의 가슴에 단비를 내려주고 있다. 21세기 젊은이들도 ‘점점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누구나 한 점에서 점점 넓어지는 원 안으로 자신만의 삶의 원을 만들며 살아간다. 누구는 그것을 자존이라고 하고 누구는 그것을 자아라고 하고 누구는 그것을 실존이라고 하며 저마다 자기에게 맞는 이름을 붙인다. 누구나 흔들리는 영혼을 위로할 무기 하나쯤은 지니고 살고 있을 것이다. 릴케는 ‘시’라는 무기로 인간을 흔들고 우주를 흔들어 깨운다. 덧없는 인생의 슬픔을 그렇게라도 붙잡아두고 싶었을 것인지 모른다. 

 

릴케처럼 나도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다. 내가 한 마리 독수리인지, 폭풍인지, 아니면 대단한 노래인지 모르고 있다. 그러나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은 다행 중의 다행이다. 모른다는 걸 모르는 일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 나는 릴케처럼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면서 독수리가 되었다가 폭풍이 되었다가 또 대단한 노래가 되었다가 하면서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불 켜진 나의 존재의 집에는 아직 새벽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오면 불을 거두고 원 밖으로 나갈 테지만 아직 새벽은 오지 않았기에 존재의 집에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씨줄과 날줄을 엮어 삶을 짜고 있다.

 

릴케는 1899년 봄 처음으로 러시아를 여행했다. 러시아라는 이국의 묘한 분위기에 릴케는 압도당한다. 러시아는 신앙 공동체를 중시되는 곳이었기에 릴케는 그런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러시아 여행 중에 영감을 받아 ‘나는 넓어지는 원 안에서 살아가네’를 썼다. 이 시는 1905년 발표된 기도시집 앞 부부분에 실리게 된다. 여행은 릴케에게 있어 삶의 일부분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고립된 채 정처 없는 떠돌이가 되어 유럽 전역을 여행했다. 여행은 고립된 자아로부터 탈출하는 방법이었다. 눈으로 본 것을 시로 만드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본 것들을 시로 지어 세상을 이해했다. 

 

시인에게 자유는 사랑이다. 시인에게 사랑은 자유이며 그리움이다. 릴케는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유럽 지식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루 안드레아스 살로메에게서 사랑을 얻지 못한다. 사랑은 그리움이라는 지옥에서 피워 올린 한 송이 장미다. 인간의 감정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그리움이라는 사랑은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 시원하면서 강렬하고 강렬하면서 고통스럽고 고통스러우면서 환희롭고 환희로우면서 슬픈 감정의 폭풍 속으로 들어가 위대한 시를 탄생시킨다. 

 

칠삭둥이로 태어나 여자 옷을 입고 자란 릴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독일의 시인이 된 릴케, 격동의 시대 속에서 실존의 고뇌를 온몸을 겪어내며 시인의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릴케, 인간성을 상실한 시대의 가장 순수한 영혼을 흔들어 깨운 릴케, 1926년 12월 29일 새벽,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릴케, 그는 자신의 시구를 묘비에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도 우주 나그네가 되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기쁨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

이메일eee0411@yahoo.com 

 

작성 2023.07.27 09:47 수정 2023.07.2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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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