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기행] 치악산 구룡사


치악산 구룡사

 

가을은 명랑하게 왔다. 단풍나무 숲을 헤치며 가을은 내게로 왔다. 명랑한 가을은 나의 이기주의를 넘어 찬란하게 왔다. 게으름에 빠져 버린 이기주의를 방치해 두고 있었던 나는 나를 찾아온 명랑한 가을과 함께 명랑하게 치악산 구룡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나의 모순덩어리에 얹혀살던 이기주의를 다 털어내진 못했지만 구룡사에 가면 나의 이기주의는 명랑한 가을처럼 명랑해 질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치악산에 기대 천년을 구도하고 있는 구룡사처럼 말이다.

 

가을한철을 긴 여행으로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명랑한 가을이 왔다. 중국으로 일본으로 러시아로 떠돌아다닐 때의 가을은 유목민처럼 흐르는 별들의 소리를 들었지만 다시 돌아와 명랑한 가을 앞에 서니 미당선생이 노래한 한 송이 국화꽃처럼 인생의 뒤안길로 따뜻한 추억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가을은 종로에서 유난했고 나는 유난한 가을을 한 아름 머리에 이고 종로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시월국화는 시월에 핀다던 조계사 마당에서 국화향기에 취하기도 하고 소국이 핀 북악산을 오르며 가을의 향기에 마음을 헹구어 내기고 했었다. 그러나 나는 허전했다. 허전한 그 무엇인가가 나를 옥죄어 왔다. 그럴 때마다 치악산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치악산은 어서 떠나오라고 자꾸 불러댔다.

 

가을이 옳았다. 나를 불러낸 명랑한 가을은 옳았다. 세상의 빛들은 가을에 더 찬란하게 몰려와 산에서 수런거렸다. 가을은 백두대간을 떠받치고 있는 오대산을 지나 서쪽 태기산에서 한바탕 놀다가 원주의 진산 치악산에 와서 붉은 빛들을 한껏 뿌려 놓았다. 바람은 깊은 골짝의 단풍들을 휘감고 돌아 첩첩산중으로 풀어놓고는 구룡사에 도달하여 선승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나는 가을바람이 뿌려놓은 단풍잎을 사각사각 밟으며 구룡사로 걸어갔다.

 


적악산이라는 옛 이름은 일찍이 사라져 버리고 그 유명한 전설이 만들어낸 치악이 구룡사 앞에 놓여 있었다. 뱀에게 먹히려던 꿩을 나그네가 구해 주었는데 그 꿩의 은혜갚음으로 나그네는 위기에서 목숨을 건졌다는 치악雉岳적악赤嶽을 누르고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치악에 영서의 대찰 구룡사龜龍寺가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가 연꽃을 토하고 있고 바다의 용이 마치 구름을 토해낸 것 같은 천하의 절터라고 신라의 의상대사는 구룡사의 자리를 그렇게 찾아내어 대 가람을 창건했다.

 

천년 넘는 긴 세월동안 전설이 어디 없을까마는 구룡사의 전설은 높고 험한 산세만큼이나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깊은 연못에 의상대사가 절을 지으려고 하자 용들이 난리가 났다. 자신들의 보금자리가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를 저지하려고 천둥번개와 함께 비를 뿌려댔다. 그러나 의상대사는 차분하게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연못에 넣었다. 그러자 갑자기 물이 말라 버리고 여덟 마리의 용은 앞산을 여덟 조각으로 갈라놓고 동해바다로 도망을 치고 나머지 한 마리는 눈이 멀어 버렸다. 용들을 모두 쫓아낸 연못을 메우고 의상대사는 구룡사를 세웠다. 그래서 구룡사九龍寺라고 이름 했는데 조선 중기 이후에 절의 기운이 다해 절이 기울자 어떤 노인이 찾아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고 조언했다. 하여 혈을 끊었으나 절은 계속 쇠락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이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 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구룡사九龍寺에서 구룡사龜龍寺로 불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천 년 전의 구룡사도 가을은 명랑했을까. 바람이 단풍들을 몰고 다니며 깊은 계곡을 뒤덮어 놓았을까.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의상대사도 치악산의 명랑한 가을 보았을까 생각하는 동안 금강송 숲길을 지나 구룡사 일주문 앞에 당도했다. 사천왕문에서 사천왕들께 인사들 드리고 구도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마침내 대웅전에 앞에서 부처님께 손을 모우고 예를 드렸다. 대웅전을 살펴보니 기둥위에 주심포를 두고 주심포 사이에도 공간포를 배치한 다포계양식의 팔작지붕이었다. 대웅전 외부의 연꽃조각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불상위에 있는 보개는 중층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고도 장엄했다. 구룡사 대웅전이 유형문화재 제24호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구룡사 대웅전 앞에 명랑한 가을을 내려놓고 순명한 가을을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순명에 닿을 인생의 가을을 부처님은 알고 있었으리라. 자연이 그러하듯 사람도 그러했는지 모른다. 나의 가을은 또 어김없이 찾아 올 테고 구룡사의 가을도 변함없이 또 올 것이다. 구룡사의 부처님은 언제나 그대로 순명한 계절을 맞이하고 보내면서 또 천년을 그렇게 한결같이 거기 있을 것이다. 나는 또 어느 날 문득 구룡사를 찾아 명랑한 가을을 안고 찾아왔던 그때의 나를 그리워할지 모를 일이다.

 

 


전승선 기자
작성 2019.05.20 08:43 수정 2019.05.20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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