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란 쉽지 않다. 변하지 않으면 도태되고 살아남지 못하는 시절이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살아남고 그래야 일류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모순과 부조리가 극에 달해 임계점을 넘으면 반드시 반전이 일어나게 된다. 세상 이치가 그러하다. 그래도 누군가를 향한 일편단심의 지극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일편단심 말고 다른 대안이 없는 것일까. 일편단심은 우리 마음에 문화적 유전자로 남은 강고함이자 고질적 병폐인지 모른다.
정몽주의 단심가를 명상하듯 홀로 낭송하다 보면 변화란 무엇이며 멈춤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물론 나는 정몽주가 아니니 그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단심가에 숨은 인간적 고뇌와 번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이 성나면 배를 업는 법이다. 강의 주인은 배가 아니라 물이기 때문이다. 이걸 모르지 않는 정몽주가 구태여 단심가를 부르며 일편단심을 부르짖는 건 그만한 사정이 있을 것이다. 변화의 중심에서 변화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주변머리로 물러나야 했던 그의 고뇌를 이해한다.
정치는 그런 것이다. 너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부패한 권력을 심판해야 할 관리이자 최고의 학자가 그 권력의 충신으로 오히려 역사라는 이름의 권력이 된 것이다. 그렇다. 그는 정몽주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권력을 얻은 셈이다. 누군가를 위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서 백골이 먼지가 되고 흙이 되어 넋도 사라지고 없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는다는 이 지독한 사랑은 진심일까.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는 건 아니었을까. 역사라는 권력에서 이름을 얻으려는 방편은 아니었을까. 어차피 개혁파에게 죽임을 당할 바엔 충신이나 되자는 심정이었을까.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아닌 건 아니라는 이 지독한 ‘골수리즘’을 이해하기 위해 단심가는 오히려 약하다. 요즘 정치판을 봐도 국회의원에 공천받기 위해 영혼까지 파는 걸 보면 정치라는 권력은 ‘골수리즘’ 보다 더 지독하다. 결국 잘 먹고 잘살고 이름 남기는데 인생을 건 사람들의 욕망은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해 못 한다. 충신인지 간신인지 그런 우리가 판단할 일은 아니다. 시 속에 드러난 정몽주의 ‘골수리즘’과 ‘지독리즘’에 혀를 내두를 뿐이다.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하는 연민도 생긴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에게 충성하는 건 자연의 이치다.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주인은 개에게 하나님이다. 월급을 주는 회사 사장님은 직원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회사에 충실해야 하는 건 백번 옳다. 하물며 한 나라의 존망을 지켜보며 죽느냐 사느냐는 기로에 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을 감히 읽어낼 수 없을 것이다. 고려의 능력 있는 고위공무원이자 최고의 성리학자인 정몽주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비판하지 않았다. 최영의 죽음에도 입을 다물었고 심지어 정도전과 개혁을 같이 하기로 결의까지 했었다. 단심가를 쓴 마음과 그의 행적은 모순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방원이 잔치를 열고 정몽주를 초대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하여가’를 읊자 정몽주는 ‘단심가’를 읊어 고려 충신으로 남겠다고 한다. 정몽주도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방원의 부하가 되어도 결국 제거될 것이므로 그럴 바엔 깨끗하게 고려의 충신으로 남는 게 후대에 이름이라도 떨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권력은 원래 비정한 것이라는 걸 왜 몰랐겠는가.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이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어떤 이는 저런 선택을 한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없다. 개혁하고 혁신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 현실을 지키면서 사는 게 맞는 것인지 각자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골백번 고쳐 죽어도 좋을 세상이 오는 걸 막아야 할지 막지 말아야 할지 우리는 여전히 아리송하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은 그저 타이밍일 뿐이다. 살아남는 타이밍, 이름을 얻는 타이밍,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을 피하는 타이밍으로 선택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누구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다.
정몽주가 9살 때 여종을 위해 대필해준 연애편지를 보면 어렸을 때부터 시가 주는 힘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 마디 덧붙이는데 세간에서 병 많은 것이 상사병이라 하더이다’ 아홉 살 어린애가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기술이 남다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나이는 아니어도 인간의 본능은 이미 사랑의 유전자가 심겨 있지 않던가. 남녀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있어 적극적이고 용감한 것을 보면 ‘단심가’를 지은 마음도 이해된다. 자유주의자이면서 수구적인 면을 가진 정몽주에게 고려는 일편단심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일편단심해야만 하는 당위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은 것은 아닐까.
불확실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는 것도 인간의 본성이다. 생명은 원래 야성이다. 생명력은 야성적이고 살아남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그게 생명이다. 사람이라는 핵심 콘셉트는 생명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정몽주의 단심가는 관념으로 창조한 역사비지니스일지 모른다. 고독한 한 인간이 고통의 강을 건너며 웅얼거린 자기 구원의 세뇌는 아니었을지 그 세뇌에 세뇌당한 우리는 오백 년 넘게 일편단심으로 일백 번 고쳐 죽더라도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진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