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를 향하여~, 우향우. 좌향좌. 뒤로 돌아~ 앞으로~ 옆으로 갓! 이런 구령(口令)이 대한민국에 내려진 듯하다. 21세기 불어온 트로트 열풍, 흘러온 100년 유행가의 르네상스가 아닌, 온고지신 리메이크 바람인 것이 아쉬움을 갖게 하지만, 전통민요 가수, 국악 전공자, 성악 전공자, 뮤지컬 배우, 재즈 보컬리스트, 팝페라 가수들이 트로트를 향하여 돌진하고 있음은 기이하기보다는 물질과 인기를 지향한 경도된 트렌드로 봐야하리.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시청률 증가, 가수들은 스스로의 상품 브랜딩, 안방 시청자들은 총천연색 모니터 앞에 횡대 대형으로 앉아서 덩실덩실, 때때로 SNS를 통해 나의 팬덤가수를 향한 국민투표에 참여하면서 인기 불덩어리를 던진다. 투표(投票)의 표(票)가 불똥 튈 표 자라는 것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이런 바람을 타고 경기민요전수자 이소나가 부른 노래가 <물레야>이다. 원곡 가수 김지애의 절창, 홀로 타는 등불마저 쓸쓸한 밤에 물레를 안고 시름을 견디어내는 아낙네의 설움.
한밤이 지났느냐 돌아라 물레야 / 홀로 타는 등불마저 쓸쓸한 밤을 / 너 아니면 나는 어떻게 / 하루 이틀 기다린 님이 / 달이 가도 해가 가도 물레만 도네 /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무심한 님이시여 / 돌아가는 물레야.
이 절창의 테마는 홀로 타는 등불 아래 물레질을 하는 아낙네다. 그렇게 하루 이틀 밤을 지새운 날이, 달을 지나 해를 넘겼다.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올 당시 김지애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36년이 흘러갔고, 노래 주인공은 이순을 넘긴 황혼의 나그네가 되어 있다. 김지애는 어느 하늘 아래서 밤을 지새우며 세월의 물레를 돌리고 있을까.
노랫말을 얽은 금나영은 오선지 위에 우리네 어머니들의 한 많은 세상살이를 걸쳤다. 야심한 밤 적막 속에 기다리는 낭군은 오시지 않고, 돌아가는 물레 옆에는 호롱불이 간들간들 타들어가고 있다. 엄니의 주름 골이 아련해진다.
물레는 우리나라 여인들의 거칠거리는 삶 속에서 얼룩진 한을 돌돌 감아 돌리면서 목화솜이나 누에고치에서 실을 빼내어 감던 기구다. 명주 비단포를 짜는 실(絲, 사)을 손으로 돌려서 뽑아내던 것.
이 목화는 경상도 진주목 강성현이 본거지인 남평 문씨의 시조 문익점(1329~1398)이, 1363년 사간원 좌정언이 된 후, 4월에 원나라 운남성(중국 남부, 베트남 접경지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가지고 개경(개성)으로 돌아온다. 이후 처가가 있는 진주로 귀향해서 목화재배를 시작한다.
문익점의 빙부(聘父, 장인) 정천익과의 합작이었다. 이 문익점의 손자 이름이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이다. 이들이 실을 잣는 기구를 개량했다. 그 문래 이름이 변천되어 물레가 되었다.
<물레야> 노래는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지 620여 년 만에 유행가로 환생한 것이다. 이 노래가 2020년 트롯 전국체전에서 중요무형문화재의 목청을 타고 절창된, 허공중을 향하여 내 지른 화살 같은 목소리로다.
한밤이 지났느냐 돌아라 물레야 / 홀로 타는 등불마저 쓸쓸한 밤을 / 너 아니면 나는 어떻게 / 하루 이틀 기다린 님이 / 달이 가도 해가 가도 물레만 도네 / 기다려도 오지 않는 무심한 님이시여 / 돌아가는 물레야.
물레는 목화솜과 누에고치를 실의 형태로 꼬아서 명주실로 만든다. 왼손으로 실밥을 이어가면서 오른손으로 손잡이를 돌리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가락을 흥얼거리시던 할머니 모습이 떠오른다.
이는 정학유(丁學游, 1786∼1855)가 지은 <농가월령가>에는 물네, <월여농가>(1861년, 철종12. 김형수)에는 방차(紡車)·문레로 표기되었다. 경상도 영산에서는 물리라고도 한다.
김지애는 1962년 서울 출생. 본 이름은 동길영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KBS 어린이 노래자랑에서 <어머니의 은혜>를 불러 대상을 받았다. 덕성여고 재학생일 때는 미국동포위문공연단원으로 선발되어 공연을 다녀왔고, 이후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83년에는 작곡가 박춘석을 만나, 그해 가수 백일희가 1950년대에 발표한 <목포의 부르스>로 데뷔하였다. 백일희는 본명 이해주, 황해도 해주 출생. <단장의 미아리고개>를 부른 이해연(李海燕)의 친동생, <연안부두>를 부른 김트리오(김파·김단·김선)의 이모다. 당시 미8군무대에서 활동하던 이해연은 그 시절 미8군무대를 프로모션하던 화양흥업 대표 베니 김(본명 김영순)과 부부다.
문익점(1329~1398. 진주)은 중국 운남에서, 중국인들이 목화를 이용하여 실을 뽑고 옷을 지어서 입는 모습을 접했다. 이에 목화씨를 고국 고려에 가져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봉건시대 비즈니스맨의 안목이었다. 하지만 원나라는 법으로 목화씨를 나라 밖으로 가져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 규제를 알아차린 문익점은 귀국할 때 자신의 동반자 김룡(金龍)과 함께 밭을 지키던 노파에게 부탁하여, 그 씨 몇 알을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왔단다. 이 얼마나 선각적인 혜안과 안목을 가진 나라의 관리인가.
오늘날 중국 장가계·원가계 여행을 많이 간다. 1982년 9월 중국 최초로 국가삼림공원이 된 이곳은, 장사공항에서 3백여 킬로미터를 고속버스로 달려가야 하는데, 좌우로 지평선처럼 펼쳐진 들판이 온통 목화밭이다. 중국 목화 역사를 증거라도 하는 듯하다.
문익점은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한다. 이 목화에서 씨를 제거하고 실을 뽑는 방법은 장인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호승(胡僧)에게 배웠단다. 이것을 토대로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은 실 잦는 기구를 개량했단다. 그러니 물레는, 바로 발명자 문래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익점은 1367년에는 향리 사람들에게 씨앗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단다. 훗날 남명 조식(1501~1572)은 문익점의 공을 기려,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 씨와 같다고 했다. 그가 붙인 문익점의 별호가 의피생민 후직동(衣被生民 后稷同)이다.
왜 트로트 경연장으로 뭇 가객들이 몰려들까. 대중가요 유행가 노래는 완제품 문화예술 상품이다. 작품자(작사·작곡·편곡)는 제조자로서 저작권을 갖고, 가수는 저작권이 없다. 그래서 자기의 이름을 단 상품(노래)을 들고 시장(행사장·라이브 공연장 등)으로 나서거나 초청되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실연(實演) 노래를 하고, 적정 사례나 보상을 받는다. 특정 노래를 특정 가수의 노래하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행가는 역사 속의 사건이나 이름 지명 등에 얽힌 사연을 머금어야 100년을 간다. 서정가요(抒情歌謠)와 서사가요(抒史歌謠) 중, 오랜 세월을 흘러온 국민애창곡은 후자가 많다. 서사 유행가는 역사의 보물이다. 이 보물은 지나간 역사(승자나 패자의 기록)에 대하여 노랫말로 역습을 가할 수가 있다. 역사는 앞질러 기습을 하기에는 변수가 많고, 완료된 박제에 대하여서는 역습을 하면 마른 박제일지라도 따끔거린다.
[유차영]
시인
수필가
문화예술교육사
한국유행가연구원 원장
유행가스토리텔러 제1호
이메일 : 519444@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