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그냥 이대로 뒤돌아 가는가.
넌 그냥 이대로 날 잊어버리나.
난 그냥 이대로 뒤돌아 가는가.
널 그냥 이대로 보내긴 내 가슴이 너무나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3년에 불러서 화제를 모았던 ‘하여가’의 후렴 부분이다. 대한민국 대중가요계에서 ‘하여가’는 역대 최고의 이변을 낳은 사건이었다. 이 노래의 제목이 심상치 않은 것은 이방원의 시 ‘하여가’와 같기 때문이었다. 원래 제목이 ‘변해버린 너’였는데 서태지의 외삼촌이 ‘하여가’로 하면 좋겠다는 조언으로 ‘하여가’가 탄생했다는 숨은 이야기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야 하는 복잡한 심경을 표현한 ‘하여가’를 듣고 젊은이들은 열광했다. 변해버린 건 필요가 없고 이제는 너를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는 애증의 관계를 아주 섬세하게 표현한 가사에 제목을 왜 ‘하여가’로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어떠하든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니 이별은 정해진 것이고 그 정해진 이별 뒤에 그리움만 남는다는 노래다.
‘하여가何如歌’는 어찌 ‘하’, 같을 ‘여’, 노래 ‘가’다. ‘하여가’가 우리말의 ‘하여간’이나 ‘하여튼’과 비슷한 음이며 뜻과 비슷하다. 한마디로 따지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부른 ‘하여가’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이별하자면서 너의 미소와 너만의 목소리 모든 게 그리워진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갖는 사랑에 대한 복잡미묘한 심정을 노래한 것으로 해석이 되지만 문제는 ‘하여가’라는 제목에 대한 의미가 여러 가지로 겹치면서 머릿속을 맴돌아 자꾸 따지고 싶어진다.
‘하여가’를 이방원만 쓰라는 법은 없지만 21세기 가수가 ‘하여가’를 쓰다니 무엇인지 모를 문화적 충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젊은이들의 이별의 ‘하여가’와 이방원이 정몽주를 향해 회유하기 위해 읊은 ‘하여가’를 이해하자니 쉽지 않은 건 당연하다. 이방원의 ‘하여가’를 풀이해 보면 이보다 쉽고 명료한 시는 드물다. 군더더기가 없다,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한눈에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이면에 숨은 코드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 이면까지 들여다보면 더 재밌다. 사람의 마음이 복잡미묘하게 얽히고설켜 있다. 너는 이미 내 편이 아니니까 고려의 충신으로 남는 게 남는 장사야 하는 애증도 엿보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
‘하여가’를 풀어보면 ‘어떠하리’라며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상대방의 의중을 묻는 시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한 이방원이 고려의 최고 관리이자 성리학자인 정몽주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인데 이왕 나라가 바꿨으니 옳은지 그른지 묻지 말고 그냥 다 같이 잘살아보자고 하지만 정몽주가 취한 태도나 상황으로 봐서 그는 이방원에게 오지 않을 것을 간파하고 마지막 기회를 주었노라는 명문을 쌓기 위한 시가 아니었을까.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야 하는 정몽주에게도 왕이 되어야 하는 이방원 자신에게도 정치에서 명분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명분이 없으면 민심을 얻지 못한다. 민심은 곧 천심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건국하면 건국 동지들은 다 한자리씩 꿰차게 마련이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한 이방원에게 한자리는 곧 왕의 자리다. 그러나 이성계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픈 열망을 이루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그 산 중의 하나가 고려의 정몽주다. 이색의 제자인 정도전은 이미 혁명동지이니 천천히 죽여도 되지만 당장 정몽주가 문제였을 것이다. 걸림돌 하나를 치우기 위해 그는 ‘하여가’를 슬쩍 띄워 정몽주의 마음을 살피며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노라고 ‘단심가’로 화답했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는 게 어쩌면 그나마 역사에 이름이라도 남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일백 번 고쳐 죽어도 임 향한 일편단심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화답한다. 단심가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겠다는 것보다 이방원과 함께 하기 싫다고 이방원을 욕보인 것이다. 썩을 대로 썩은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워서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정몽주가 모를 리 있겠는가. 지붕이며 벽이며 대들보까지 폭삭 내려앉은 고려를 버리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게 먹힌다는 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민족이 산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이방원 너와는 함께 하기 싫다는 신념을 단심가에 표현했던 건 아닐까. 요즘 유행어로 ‘응 넌, 아니야’ 하면서 이방원을 조롱한 것이 단심가다.
인생의 갈림길에 섰을 때 누구는 ‘단심가’를 읊고 누구는 ‘하여가’를 읊는다. 일백 번 고쳐 죽을 일이 있을지, 또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질 일이 있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지만 시란 사람의 마음을 다 표현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마음은 저쪽 뒤에서 서성이며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 시 하나로 마음이 드러났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은 생각이다. 이방원의 마음이 ‘하여가’라고 생각하면 정치를 모르거나 권력의 습성을 모르는 말이다. ‘우리도 이같이 얽혀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는 문장에서 우리는 이방원의 속마음을 확 뒤집어 봐야 한다. 왜냐면 권력이 어디 나눌 수 있는 것인가. 권력이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는 절대성을 지닌 것이다.
‘시’는 마음의 집이다. 마음을 감추어야 할 때 시는 적절한 대상이 되고 마음을 내보여야 할 때 가장 좋은 도구다. 시는 큰 틀 안에서 ‘충만한 현재형’이다. 과거의 정서뿐만 아니라 현재의 정서와 미래의 마음까지 모두 담아내는 마음의 집이다. 삶의 궤적을 해체하기도 하고 통합하기도 하면서 때론 시의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또 시의 천국에 들어가기도 한다. 이방원의 ‘하여가’는 자신에게 지옥의 집이었을까 천국의 집이었을까. 오백여 년이 지난 우리에게 ‘하여가’는 어떤 마음의 집이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이순영]
수필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