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금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시야가 좁아지고 조급해집니다. 이것을 터널비전(tunnel vision)현상이라고 부르지요. 목표와 성취 그 자체를 위해서 달리지 않고 보상과 처벌에 따라 일을 하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집니다.
- 정재승,『열두 발자국』에서
공부모임 시간에 한 회원이 질문을 했다.
“왜 명문대 출신들이 사이비 종교에 많이 빠지나요?”
사이비 종교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 중에 명문대 출신과 전문직들이 많다고 한다. ‘터널비전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컴컴한 터널에 들어가면 먼 출구의 희미한 불빛만 보인다.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오로지 그 불빛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상금’이 커질수록 우리는 터널에 빠져들기 쉬울 것이다. ‘명문대’가 주는 상금은 얼마나 큰가? 그 불빛만 보며 청소년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떤 사람이 될까?
명확한 목표가 없는 삶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정신없이 달려오다 명문대에 가고 전문직에 입성해 안정을 찾았을 때, 그들은 다시 목표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사이비 종교는 구원, 영생을 약속한다. 이 얼마나 고귀한 목표인가? 그들은 당연히 인간 최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는 목표 없이 살아야 한다.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말한다.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세상이 주는 상금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아주 먼 곳에서 태양처럼 빛난다. 우리는 그것을 향해 달려가야 했다.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보려면, 가까운 가족부터 시작해 전혀 관계없는 모든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
온 세상과의 싸움은 지친다. 그래서 다들 컴컴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 먼 곳의 하얀 빛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게 된다. 터널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우리는 불빛을 찾게 된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다. 항상 먼 곳을 꿈꾼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목표 없이 살아야 한다. 그러면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씨앗 하나가 자신을 가꾸어 가듯이.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씨앗은 어느 날 갑갑함을 느꼈을 것이다.
“아, 내 몸에서 무언가가 솟아 나오려 해! 아악! 견딜 수가 없어!”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싹을 틔웠을 것이다. 그는 계속 안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살았을 것이다. 빛을 향해 물을 향해.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갔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간다. 인간만이 밖의 불빛을 보며 살아간다.
월요일 식당 바닥을 청소하며
불빛이 희망이라고 했던 사람의 말
믿지 않기로 했다 어젯밤
형광등에 몰려들던 날벌레들이
오늘 탁자에, 바닥에 누워 있지 않은가
- 길상호, <희망에 부딪혀 죽다> 부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망에 부딪혀 비명횡사했을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일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들은 안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산다. 자신도 모르게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말하고 행동을 하고 이윽고 죽는다.
[고석근]
수필가
인문학 강사
한국산문 신인상
제6회 민들레문학상 수상.
이메일: ksk21ccc-@daum.net